2003년 가을 독서의 계절은 당시 군인 신분이었던 필자에게도 찾아왔다. 사회에 있는 친구에게 읽을 만한 책을 부탁했고 친구는 무라카미 류, 밀란쿤데라, 하루키 단편집, 김규항 등 가을스러운 작가들의 책을 보내주었다. 군인의 독서는 감옥에서의 독서처럼 정독 이상의 깊이를 맛보게 해준다. 그래서 가을에 푹 빠져있는 그럴 때다. 평소 음악소통이 원활했던 후배에게 편지 한 통이 왔다.
엘리엇 스미스(Elliott Smith)가 키친 나이프로 자신의 가슴을 두 번 찔렀단다. 그래서 그가 죽었단다. 갑자기 온몸이 간지럽기 시작하더니 그의 음성을 들어야만 살 것 같았다. 대학교 4학년 때 간 군대였지만 더 늦게 갈 걸 그랬다. 그랬으면 그때 그렇게 그의 음성이 간절할 때 그의 음성을 들으며 깊이 취할 수 있었을텐데...
그때 부터다. 가을만 되면 엘리엇 스미스가 질리지도 않게 필자의 Playlist에 오른다. 가을은 엘리엇 스미스의 계절이 되었다.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노래하는 가수들이 현실에서 같은 무게의 고통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대부분의 싱어들은 연기를 한다. 조그만 가시에 찔린 고통의 감성을 확장시켜 우울하고 비참해서 죽을 것만 같은 목소리로 노래한다. 최근 장기하가 공중파에서 '싸구려커피'의 가사는 상상력을 동원해 쓴 것이지 실제로 자취를 해본 적이 없다고 했듯이 현실과 노래가 꼭 같은 무게를 지닐 필요는 없다.
그러나 엘리엇 스미스는 연기에 소질이 없는 친구였다. 가학적이고 피학적인 죽음과 고통, 외로움에 대한 가사의 노래들은 상상력을 동원한 게 아니었다. 현실과 같은 무게로 노래했던 그는 점점 더 세련된 연기를 요하는 현실에서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필자는 그의 죽음을 이렇게 바라보고 있으며 최근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도(진정 자살이라면) 금융자본의 신자유주의 질서체계에서 그의 형편없는 연기력으론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순수한 사람은 살기 힘든 세상이야"라고 순수하지 못한 사람은 쉽게 말하지만 그들에게 죽음은(진실로 살기 힘들기에) 절박한 선택이 된다.
그의 노래가 현실의 무게와 달랐다면 그는 여전히 음악활동을 하고 있겠지만 우리는 그를 주목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끔 길거리에서 해외 유명밴드의 내한공연 포스터를 볼 때 엘리엇 스미스의 내한공연을 상상해 본다. 그가 따스한 다운 스트로크로 우리의 어깨를 다독이며 'Southern Belle', 'Ballad of Big Nothing'를 부른다. 상상만으로도 코끗이 찡하다.
"나를 찾아왔던 사랑의 기억 말고는 당신들이 원하는 생각따윈 나에게 없어, 돌처럼 굳어버린 그 추억의 장면들도 이젠 혼자서 잘 떠나겠지 혼자서 잘 죽겠지" 'A Living Will'의 가사 일부다. 처음 엘리엇 스미스를 접했을때 "아! 미국의 김광석이네" 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위의 가사처럼 광석이 형처럼 혼자서 떠났다. 그리고 가을이면 불쑥 우리들 마음속에 예고없이 찾아와 알콜이 든 무엇을 마실 수 밖에 없는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까지는 아니지만 현실에 발붙이고 살면서 순간순간 연기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 슬프고 앞으로도 쭉 연기만 하다가 죽어야 할 것 같아 슬프다. 이 슬픔에서 근본적으로 해방되려면 금융자본이 장악한 시장경제에 변화가 있어야 할 텐데... 휴... 머리 아프다.
오늘 당장은 신촌의 단골술집에서 친구들과 엘리엇 스미스를 들으며 맛있는 맥주를 마시고 싶다. 그의 음악이 궁금하다면 음반은 어디 도망가지 않으니 1집 앨범부터 차근차근 들어보시길... 몇 곡을 추천하고 싶지만 고르기가 힘드네요. 턴테이블이 있다면 LP를 구해 보시길... 후회 없는 선택이 될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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