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2.24.목요일
파토
연말이고 싱숭생숭하니 오늘은 레슨 집어 치고 칼럼이나 하나 쓰자. 나의 영국 유학때 이야기.
…오부리가 좀 고지식한 면이 있다. 원래 성격이 그런데 막상 어려서 학교 다닐 때는 반항 혹은 방황하느라 너무 놀아서 이젠 거기에 대한 죄책감 머 이런 것도 좀 있다. 그래서 영국에 유학을 가면서는, 진짜 딴 생각 안하고 잡념 없이 하라는 공부만 열심히 하자.. 이런 결심을 했다. 그리고는 실제로 4년간 그렇게 살았다.
그러나 지금은 열라 후회함이다.
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점에서 후회는 없다. 다만 ‘공부만’ 했다는 점, 코스를 완벽하게 마치는 것과 시험 준비에 너무 집착했다는 게 후회스러운 거다. 성적은 신경 쓰지 않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해서 코스를 충실히 이행한다는 명분에는 심히 집착했다. 그렇게 살아 본 적이 없어서 더 그랬다.
그래서 (나이도 비슷한) 선생들이 선호하는 학생이 되었고 성적도 그만하면 잘 나왔다. 문제는 음악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아티스트로의 마인드가 그 속에서 실종되었다는 거다.
무슨 종목이던 외국에서 대학을 다녀본 사람은 알겠지만, 기본적으로 수업을 준비하고 쫓아가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졸업이 쉽지 않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데다가 아무래도 나이 먹어서 배우는 것도 느리고 말도 좀 딸리고, 무엇보다 서른이 넘어서 간 유학에서 졸업도 못하고 돌아온다는 건 스스로 용납이 될 수 없는 일.
그리하여 영국에서 오부리의 삶은 아침 7시부터 밤 12시까지 연습의 연속으로 점철되었다. 4년간 주말도 없이 그렇게 산 거다(그렇게 한 거치고는 아무리 생각해도 기타를 별로 몬친다…).
하지만 암기가 주 종목인 고시생도 아니고 음악을 한다는 자가 이렇게 살았으니, 물론 배우고 익히고 외운 것은 그만큼 많았지만 지나치게 경직되고 긴장된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된 거다. 연습벌레를 넘어 연습기계가 되어, 벌겋게 충혈된 눈에 산발한 머리로 단칸방 싸구려 의자에 언제나 기타를 메고 앉아있던 나.
뭇 여성들이 상상하는 기타리스트의 모습은 아니었으리라...
반면 같은 연습을 해도 이 녀석은 얼마나 행복한 넘이냐…
이야기가 좀 옆으로 샜는데, 여하튼 그러다 보니 주어진 과제나 연습곡 등은 조금도 틀려서는 안 된다는 편집증이 점차 생겨나게 됐다. 이런 상태는 긴장이 지나쳐 오히려 시험이나 연주에서 집중을 방해하는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했는데, 그걸 알고도 해결을 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나도 좀 심했다.
그런데, 우리 반에는 사이먼이라는 열등생이 한 명 있었다. 여자 같이 생긴 얼굴에 손가락만 거미같이 긴 이 영국인 친구는 3년간 매주 한번씩 치른 밴드 앙상블 연주 시험을 제대로 소화하는 적이 없었다. 곡을 외우지도 못하고, 연주도 다 틀리면서 주변의 선생도 동료 학생도 항상 민망해지는 상황. 무슨 이유에선지 본인은 언제나 밝고 당당하기만 했는데 실은 그게 더 민망했다.
이 학교는 학비와 비싼 런던에서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알바를 하면서 다니는 애들도 많았기 때문에 이 녀석도 아마 그 중 하나려니 했다. 하지만 저렇게 해서 학교 다니면 뭐하고 졸업을 하면 뭐할 건가? 결국 시간과 돈만 버리는 짓 아니냐.
아무리 어려도 그렇지 한심하고 비능률적으로 인생을 사는 저 생각 없는 모습을 보며, 나 자신 더더욱 학업에 매진한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는 4년째, 드디어 소위 ‘창조성’이 중요한 시기가 왔다. 자작곡을 발표하고 녹음을 해서 졸업 음반을 만드는 등의 과제가 주어졌고, 이전의 암기식 공연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무대들이 마련되었다.
그때, 모두를 놀라게 한 반전이 일어났다.
열등생이던 사이먼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거미 같은 손가락이 짚어내는 기기묘묘한 코드들, 알란 홀스워드(Alan Holdsworth)를 뺨치는 독창적인 코드 보이싱(Voicing)과 예측 불가능한 전광석화 같은 솔로, 태핑, 스윕, 거기에 절묘한 리듬감까지. 그 동안 괴짜 열등생인줄만 알았던 우리로서는 녀석의 정체를 눈앞에서 바라보며 그저 입이 벌어질 뿐이었다.
그렇다. 사이먼은 애당초 좋은 성적을 받거나 선생에게서 칭찬을 받는 따위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던 거다. 또 음악학교가 주로 포커스를 맞추는 ‘직업 음악인’, 즉 세션맨이나 뮤지컬 반주자나 악단 연주자, 유람선 밴드 같은 데도 전혀 뜻이 없었던 거다. 그렇기에 이 친구는 자신이 원하는 방향의 음악을 하기 위해 우리가 진도를 따라가느라 혈안이 된 동안 그저 필요한 공부와 연습에만 그 시간을 투자한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70년대의 알앤비나 록, 80년대 메탈, 그 옛날 재즈 스탠다드 등을 연주하는 시험 같은 것은 아무런 관심도 열정도 없을 수 밖에 없다. 이 친구가 필요한 건 자신이 추구하는 최첨단 퓨전을 위한 이론과 실기였을 뿐이고, 학과 공부는 낙제하지 않고 졸업하는 정도만 신경 썼을 뿐이었다.
하지만 끝없이 남들의 평가가 주어지는 극도의 경쟁 환경 속에서 이렇게 고집스럽게 자기 입장을 고수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양반이 알란 홀스워드.
겨우 19살의 소년이 나의 숙련된 눈과 귀에
이 사람과 동격으로 보였다는 건 절대 만만한 경우가 아니란 말씀.
첨엔 그저 감탄과 놀라움뿐이었는데, 조금씩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야말로 저렇게 해야 하지 않았을까?
서른이 넘어서 유학간 음악학교에서, 유람선 연주자가 될 생각 같은 건 애초부터 없던 난, 왜 그렇게 순간순간의 상황과 진도에만 집착을 했을까. 나이 들어서 간 체면 때문에 낙제할까 봐 두려웠던 걸까?
시험을 좀 망치더라도 밴드를 결성해서 동네 펍(Pub)에서라도 공연하러 다니고, 시내의 유명한 클럽에 가서 남들 하는 것도 많이 보고, 그러면서 뮤지션으로서의 정체성과 마인드, 자유로운 아티스트 정신 등등을 유지, 발전해야 하지 않았냐 말이다.
여하튼 나는 그러지 못했고, 나의 음악학교는 사실상의 고시원 생활로서 막을 내리고 말았다.
물론 사이먼의 방법이 꼭 정답만은 아닐지 모른다. 음악을 연주하며 먹고 살수만 있다면 유람선 연주자라도 행복할 사람도 많고, 어떤 이는 일단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완벽히 습득한 후에 자신만의 음악을 찾아가는 노력을 기울일 수도 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창조적인 아티스트로가 되고자 한다면 환경이 좀 변하더라도 거기에 잠식되지 않고 자신만의 아티스트 마인드를 항상 유지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거다. 그런 점에서 사이먼은 용기와 배짱이 있었고, 결국 막판에는 많은 학생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음악 학교는 학교일 뿐, 거길 수석 졸업한다고 최고의 아티스트가 되는 것은 아니다. 수업을 소홀히 하라는 기계적인 의미가 아니라, 내가 취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정확하게 알고 이를 적용하는 주체적인 용기가 필요하다는 점은 어떤 순간에도 잊어선 안 된다는 거다.
누군가를 예술가로 만들어주는 것은 학교도 선생도 아니고, 바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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