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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돌아가는 꼬라지

세월호 침몰 참사 배경과 원인 논란 구조 상황, 위키백과

by 속 아몬드 2014. 5. 6.

세월호 침몰 사고(世越號 沈沒 事故)는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48분경 대한민국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부근 황해 상에서 발생한 여객선 침몰 사고이다.[3] 세월호에는 경기도 안산시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 325명과 선원 30명 등 총 476명이 탑승하였다고 알려졌다.


배경

2009년 이명박 때 해운법 시행규칙이 개정되었다. 이때 여객선 운용 시한이 진수일로부터 20년에서 30년으로 늘어났다. 세월호의 소속 선박사였던 청해진해운은 덕분에, 일본에서는 운용시한 상 폐선에 가까운 18년된 세월호를 사들여 운항할 수 있었다(당시 국토해양부는 "여객선의 선령(船齡) 제한을 완화하면 기업 비용이 연간 200억원 절감될 것"이라며 규제완화에 대하여 논평했다). 이후, 청해진해운은 2012년 10월 세월호를 담보로 산업은행에서 개보수 자금 30억원 등 100억원의 차임급을 받았다. 이중 상당한 돈이 세월호 증축에 사용되었고, 이후 톤수 239톤·탑승 가능정원 116명이 늘어났다. 선박 설비 안전 검사 기관인 한국선급은 세월호의 증축 등에 대하여, 2차례에 걸쳐 문제가 없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구명정이 접근하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기울어지며, 침몰하는 원인 중 하나가 무리한 증축 때문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였다. 심지어 여객선을 임의대로 노선에 추가 투입해 출항시킨 뒤, 관계 당국에 통보하는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책임은 과징금 30만원에 불과했다. 또한, 세월호의 경우 출항 전 운항관리자에게 차량 150대, 화물 675톤을 실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사고 이후에 차량 180대, 화물 1157톤이 실린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국내 내항선 선박직(선장·항해사·조타수·기관사 등) 대부분은 1년 이하 계약직으로 일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사고 당시 세월호 선장도 월 270만원의 1년 계약직이었다. 이에 직업적 안전성이 떨어지니 소속감이나 사명감을 기대하기가 애초에 어렵다는 지적을 받았고, 실제 선원에 대한 교육 관리도 열악했다. 청해진 해운은 2013년 선원 교육비용으로 54만 1천원을 썼다. [5][6]


세월호

1994년 6월 일본 나가사키의 하야시카네 선거(林兼船渠)[내용주 1]에서 건조한 여객·화물 겸용선(RoPax, RORO passenger)[7]으로 일본 마루에이 페리 사에서 '페리 나미노우에'(フェリーなみのうえ)라는 이름으로[8][내용주 2] 18년 이상 가고시마~오키나와 나하 간을 운항하다가 2012년 9월 퇴역하였으며 청해진해운이 2012년 10월에 중고로 도입하여 개수 작업을 거친 후 2013년 3월부터 인천-제주 항로에 투입하였다.[9][10] 세월호의 이름은 "세상(世)을 초월(越)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11] 여객 정원은 921명에 차량 220대를 실을 수 있으며, 21노트의 속도로 최대 264 마일을 운항하는 것으로 알려졌다.[12]


사고해역

사고가 발생한 해역은 맹골수도가 위치한 곳으로,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맹골도 와 거차도 사이이다. 이 곳은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울돌목 다음으로 조류가 세다(최대 6노트). 섬 주변에는 암초가 많지만 항로로 이용되는 수로 자체는 깊이 30m 이상으로 암초 등 항해 장애물이 없다.[13]


원인

대한민국 정부 공식 조사

사고 원인에 대하여는 현재 해양경찰청(이하 해경) 에서 조사가 진행 중인 부분이다. 해경은 17일 긴급 브리핑에서 세월호 선장 이준석(69) 등 선박직 승무원들을 조사한 결과, 침몰 원인을 무리한 변침으로 잠정 결론 내린 상태임을 알렸다. [14] 이후 19일 검경합동수사본부에서도 무리한 변침을 침몰 원인으로 잠정 결론 내렸다. 그러나 다른 여러 원인에 대해서도 가능성을 열어두고 수사를 진행 중이다. 이는 조타기의 결함, 과적 화물의 느슨한 고정, 암초 충돌이다. [15]


가설들

다음은 침몰에 대한 가설들이다.


암초충돌설

사고 발생 초기에는 언론이 안개에 의한 암초 미발견으로 인한, 충돌가능성을 집중 조명했다. 생존자 중 일부가 들었다는 '쿵' 소리와 당시 기상상황이 안개가 있었다는 점을 고려한 주장이었다. 백점기 부산대 선박해양플랜트기술연구원장은 배의 좌초로 인한 사고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하였다.[16] [17] 하지만 이 주장은 해당 해역에 암초가 없으며, '쿵' 소리의 원인이 다른 데 있을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지적에 따라, 유력한 사고 원인에서 후순위로 밀려나게 되었다. [18][19] [20]


구조결함설

세월호와 같은 로로선은 구조적 결함으로 인한 사고의 위험성이 국제적으로 자주 지적되던 선박이다(로로선 사고 목록 참조).[21] 2009년 11월 일본에서 미쓰비시 중공업에서 건조하여, 마루에이 페리사가 운행하던 아리아케호가 침몰했다.[22] 이 선박은 과거 세월호가 나미노우에호로 활약하던 시절 운행한 해운사가 동일했고 선박 디자인과 배수량이 유사한 로로선이다. [23] 2009년 아리아케호 사고 직후, 마루에이 페리는 동일 선박인 나미노우에호를 2012년 퇴역시켰다. 그것을 청해진해운에서 싸게 수입하여 1년간 개조하였으며, 2013년 3월 이름을 세월호로 개명하고 운행을 시작하였는데 1년 1개월 만에 좌초된 것이다.[24] 한 해상전문가는 "선체가 그렇게 빨리 기운다는 것은 선박 복원력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데, 이는 선박의 구조적 결함이 원인일 가능성이 있다"라고 말했다.[25]


구조변경설

한국해양대 해사수송과학부 김길수 교수는 사고의 원인이 구조변경에 있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세월호는 2012년 10월 일본에서 수입된 뒤, 이듬해 3월까지 전남 목포에서 객실을 증설하였다. 3~5층에 객실이 증설되었고 승선정원은 181명 추가된 921명으로 많아졌으며, 선박 무게도 239t 증가했다. 이에 따라 무게중심이 원래보다 높아졌다는 것이다. 김교수는 "배를 급격히 돌린다고 전복이 되지는 않는다" 며 "구조 변경 과정에서 무게중심이 위로 올라갔다면 내ㆍ외부에서 충격이 가해졌을 때 배가 뒤집힌다" 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세월호 등록 검사를 맡았던 한국선급 관계자는 "객실 증설은 합법적인 공사, 점검 결과 운항에 문제가 없다는 결론이 나와 등록 검사를 정상 통과했다" 고 밝혔다. [26] 한편, 객실만 증축한 게 아니라, 배 앞쪽 램프웨이도 철거한 것으로 드러났다. 출입구를 줄이면 화물을 더 실을 수 있고, 배 전체 무게가 가벼워져 그만큼 객실 증축에 유리하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쪽에만 있던 램프웨이를 없애면서 오른쪽이 너무 가벼워진 게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27]


변침설(항로변경설)

변침(變針) 이란 여객선이나 항공기 운항 등에서 주로 사용하는 전문 용어로, 항로를 변경한다는 뜻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세월호가 급격한 변침으로 무게중심을 잃고 한쪽으로 쏠렸을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침몰한 세월호가 좌로 기울었다는 점도 이같은 분석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임긍수 목포해양대 해양운송시스템학부 교수는 "세월호 여객선 참사 원인이 암초가 아닌 급선회에 따른 외방경사로 추정 된다" 고 밝혔다. 그는 유속이 빠른 해역에서 선박이 회전하게 되면 선체가 5~ 10도 가량 기울게 되고 그 영향으로 선체에 실려 있던 컨테이너나 화물이 한쪽방향으로 쏠려 선박과 충돌했을 것으로 추정 했다. 이설을 지지하는 전문가들은 사고 당시 발생한 '꽝' 소리는 결박된 화물들이 풀리면서 선박에 부딪혀 발생한 소리로 보고 있다. [18][19] 이 설은 17일 해경이 긴급 브리핑에서 잠정 결론으로 발표한 견해이기도 하다. [28]


내부폭발설

공길영 한국해양대 교수와 임교수는 이견을 보였다. 그는 "변침은 침몰의 1차적 사고 원인이 아니다. 배가 이미 기운 상태에서 변침을 시도했다면 문제가 된다" 며 "가능성이 낮다" 고 했다. 그는 "조타 장치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이미 기울어진 상황에서 조타 장치를 작동해 봐야 무용지물이다" 면서 "내부에서 폭발했을 가능성이 크다. 컨테이너에도 무엇이 실렸는지 봐야 한다" 라고 말했다. 그는 암초설에 대해서는 해양 조사원들이 해도에 항로에 있는 암초들을 기입해둘 뿐 아니라 승무원들도 그 항로에 익숙할 수밖에 없다며 암초에 의한 좌초가능성을 일축했다. [29]


복합원인설(단계설)

이상윤 부경대학교 환경해양 과학기술원 공간정보 연구소 교수는 좀 더 복합적인 가설을 내세웠다. 그는 세월호 사고원인에 대해 준비 안 된 인재, 배 자체의 문제, 빠른 유속의 맹골수도를 지나간 외부악재 등이 겹치면서 총체적인 화를 불러온 것이라 하고, 사고발생의 시작점에 주목하여 6단계에 걸쳐 사고가 진행되면서 여러 원인들이 겹치면서 사고가 발생했다고 했다.[30] 또한 배의 복원력에 주목하여 그는 배가 요동치면서 배내외부의 화물들이 한쪽으로 쏠리면서 이로 인해 배의 복원력이 상실되어 배가 한쪽으로 기우는 외방경사가 발생하였을 것이라 추정했다.[31]


그는 "내부 폭발보다는 배는 6단계에 걸쳐 침몰이 진행되었다" 며 복합원인설 혹은 단계설을 주장했다. 1단계, 배는 선박하중 조정실패에 기인한 급격한 무게중심 상실의 한 원인일 수 있는 선박밸러스트 평형수 조정, 선체결함, 과적 등의 여러 이유[32]로 동적 안정성이 크게 떨어진 상태가 된다. 2단계, 배는 빠른 유속의 영향과 배 자체의 속도로 인해 배 유동이 급격해진다. 3단계, 이때 배 내부에 실린 화물이 한쪽으로 뒤집어지면서 배 자체가 균형을 잃는다. 4단계, 그 순간 배는 급격히 한쪽으로 기울며 복원력을 상실한다. 5단계, 배가 병진운동과 회전운동이 병행되면서 선체가 뒤집어지면서 본격적으로 침수된다. 6단계, 뒤집어진 배는 위쪽에 집중된 창문 등의 여러 통로로 통해 물이 쏟아지면서 슬래밍(slamming) 이 일어나면서 배가 급속히 침몰한다.[33]


그는 3-4단계 과정에서 급속한 선회기동을 하는 변침(변침) 이 발생했다고 한다. 3단계에서 배 내부의 화물들이 한쪽으로 쏠리면서 배 내부에 타공이 생겼을 가능성도 있고, 선적화물 등이 배갑판 등을 때릴 때 이를 승객들은 꽝하는 굉음(내부충격) 으로 들었을 수도 있다고 추정했다. 배 주변의 빠른 유속과 배 속도가 배가 되면서 배 내외부의 구조변경이 있었을 경우(구조변경), 이러한 1-6단계가 급속도로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도 추정했다. [34][35][36][37][38][39][40][41][42][43]


또 세월호 관련 해운조합의 운항관리 부실이 지적되었으며, 해수부는 "운항관리자 독립성 강화와 운항관리를 개선할 것"이라 했다. 이교수는 세월호의 사고원인에 대해 능력부족의 인재, 과적 및 밸러스터 평형수 조정 및 조타 등의 문제와 같은 선체 자체의 문제, 맹골수도라는 급격한 유속이 지나는 위험항로 등의 문제가 함께 복합된 것이 이번 사고원인의 중요한 요소라 하고, 총체적인 문제들이 6단계로 진행되면서 이번 사고의 발생 원인이 되었다고 했다.[44] 세월호의 사고항로인 맹골수도 항로 자체가 사고발생 개연성이 원래부터 높았다. 과거 한해에만 해난사고가 이 지역에서 네, 다섯 건 씩 발생했다. 이 맹골수도 항로는 과거 2002년부터 이곳에서 발생한 사고만 무려 58건, 한해에 4~5번꼴로 사고가 나는 사고다발 지역이며, 서해안의 평균 시속 5㎞보다 2배 넘게 빠른 곳으로 1등 항해사도 쉽지 않은 위험수로다. 이교수는 이 항로가 조류가 센 점에서 언제든지 사고가 일어날 개연성이 있기에, 항로에 대해서 재검토를 해봐야 될 시점임을 지적했다. [45]


또한 그는 사고의 중요한 원인 중에 하나로 과적부분을 지적하고, 배내외부에 화물이 과적되고 이때 결박까지 느슨한 상태에서, 화물이 좌우로 요동되면 관성력 작용으로 배의 요동이 더욱 심해지면서 2-3단계에서 배의 외방경사가 더욱 심해질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세월호 선원들이 6시간에 한번 씩 배화물의 결박여부를 점검했는지를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고도 지적하였다. [46]


과적 및 선체결함설

이 견해는 2014년 4월 19일자 오전 10시경부산일보와 그날 오후에 종편 방송사 JTBC에서 제기한 것이다. 부산일보 4월 19일자 보도 상, 한국해운조합에 따르면 세월호는 4월 15일 출항 전 화물 657t, 차량 150대를 실었다고 조합에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실제 확인 결과 세월호는 화물 1천157t, 차량 180대를 싣고 있었기에 이는 화물은 무려 500t, 차량은 30대를 초과 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곧 화물 500t 차량 30대 초과한 상태에서 밧줄로 제대로 묶지도 않았기에 선박 하중조절 실패도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견해이다. [47]


한편 세월호에 얼마 전까지 근무했던, 기관사는 먼저 선박이 회전을 할 때 균형을 잡아주는 선박 양 측면의 스태빌라이저가 결함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스태빌라이저는 선박 측면에 날개 모양의 형태로, 선체의 안과 밖을 반복적으로 왕복한다. 급회전 시 이 스태빌라이저가 작동하지 않으면 배가 기울어버린다. 그런데 여기에는 전제조건이 있는데, 화물의 과적재이다. 이에 대해 청해진해운 측은 과적재가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JTBC는 이를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세월호의 전체 중량은 6,825톤인데, 이것은 선박 자체, 화물, 승객, 연료 등의 무게를 모두 더한 수치다(만재배수톤수). 이 무게를 넘어서게 되면 과적이 돼 출항을 할 수 없는 것이 원칙이다. 세월호 배 자체의 무게는 3,031톤, 선사 측이 밝힌 화물과 승객 무게는 3,638톤이다. 모두 더하면 6,825톤을 넘지 않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으로 보이지만, 배의 연료와 평형수 등의 무게가 누락돼 있다는 것이다. 세월호 연료로 쓰인 벙커C유와 내부 발전용인 경유를 환산한 무게는 약 160톤으로 이를 더하면, 6,825톤을 넘어선다는 것이다. 윤종희 한국해양대 교수는 "모든 것을 실은 상태에서 거기 화물도 있고, 연료·물·선용품 음식 등 이런 거 다 있지 않습니까. 그런 종류도 다 포함돼요."라고 밝혔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청해진해운 측은 답변을 하지 않았다.


또한, 평형수 문제 역시 선박의 동적안정성을 저해할 수 있는 요인으로 거론 한다. 승객들의 증언에 따르면, 세월호는 침몰되기 한 시간 전인 7시 40분경부터 이미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된 데는 이른바 평형수 탱크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 아니냐는 주장이다. 평형수 탱크는 선박 가장 아래 부분에 위치하는데, 좌우 3개씩 모두 6개의 물탱크로 이루어져 있다. 평형수는 해수를 담아 배의 좌우 균형을 맞춰준다. 그런데, 최근까지 세월호에서 일했던 전직 선원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물이 한쪽으로 실리는 경향이 있어요. 한 번 물을 딱 맞춰 놓으면 그대로 있어야 하는데…" 즉, 좌우 균형이 맞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편 JTBC는 평형수 시설이 2월에 수리를 하고, 안전점검까지 받아 통과했지만 그 이후에도 선원들은 전혀 고쳐진 바가 없다고 했다고 언급했다. 또한, 스태빌라이저 역시 부품이 없어 수리를 받지 못했고. 적재된 컨테이너 역시 쇠줄이 아닌 밧줄로 묶여 있었다는 점도 지적했다. [48] [49]


느슨한 결박설

세월호 전 항해사 김모씨는 4월 21일자 JTBC 뉴스 9 손석희 앵커와의 대화에서 스태빌라이저나 평형수, 변침 등의 문제는 결정적인 문제가 아니라며, "침몰한 세월호는 결박을 제대로 안했을 것"이라 했다. 세월호에서 "자동차나 콘테이너 등 화물은 형식적으로 결박될 뿐"이라며 "앞뒤 결박은 형식적으로 하지만 좌우 결박은 대개 제대로 안한다"고 전했다. 그는 일상적인 비유를 들어서, 사고원인을 설명했다. 손석희 앵커가 백화점에서 물건을 구매 후 자가용 뒷 자석에 2단으로 쌓아놓은 후, 운전하면서 코너를 몇번 꺾었다고 가정해보라는 것이다. 한 번에 많은 각도를 꺾지 않더라도 작은 각도로 여러번 꺾게 되면 쌓아놓은 물건이 옆으로 쏠리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 "결박 비용이 비싸기 때문에 회사에 신청해도 잘 해주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50] 또, 인천항 선박의 화물 결박을 현장에서 직접 담당하는 인천항운노조는 컨테이너 결박에 꼭 필요한 라싱바와 브릿지피팅 같은 전문 장비가 세월호에는 처음부터 없었다고 밝혔다.[51]


그 외

일부 누리꾼들은 정부가 서울시 공무원 간첩증거조작 사건과 관련하여,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의 사과문 발표가 난 가운데 갑자기 사건이 발생한 것이 의심스럽다는 추측을 내놓았다. 종편방송 언론사 채널A는 이런 의심을 '엉뚱한 음모론'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52] 한편 정재학 편집의원은 16일 데일리저널에 올린 '세월호 침몰이 이상하다'는 제목의 글을 통해 "세월호가 침몰한 해역이 암초가 없었으며, 당시 가시거리가 나쁘지 않고, 물결도 잔잔했으며, 세월호가 상시 운항하던 곳이라" 다른 선박과 부딪혀 침몰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또한, "그래서 어떤 배와 부딪혔는지 의문"이 생긴다며, 암초도 아니고 충돌선박에 대한 선장의 보고도 없었으므로, 그 충격은 북한의 소행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53] 이와 같이 일부 언론들이 제기하는 북한 소행설에 대하여, 정부는 '수사 중'이라고만 짧게 대답했다. [54]


발생 및 수습

사고 발생 (4월 16일)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52분 32초 (KST), 전남소방본부 119상황실에 최초로 신고 전화가 걸려왔다. 최초 신고자인 학생이 던진 첫마디는 "살려주세요"였고, 이후 그는 배가 침몰하고 있음을 알렸다. 당시 신고전화를 받은 전남소방본부 관계자는 내용을 듣고 목포해경을 연결했다 (54분 07초). 그런데 목표 해경은 최초 신고자에게 제일 먼저 경도와 위도를 말하라며, 배의 위치를 물었다. 당황한 최초 신고자가 '네?'를 연발하자 119관계자는 그가 탑승객임을 알렸다. 하지만 해경은 반복해서 GPS를 거론하는 등, 위치를 물었다. 그로부터 1분 30초 뒤 해경 측은 선박 이름이 무엇인지 물었고, 최초 신고자는 "세월호"라고 답했다(이러한 시간 지연에 대하여, 후일 박진수 한국해양대 항해학부 교수는 선박 이름부터 묻는 것은 기본임을 지적하고 "구조를 하려면 순서를 누가, 어디서, 무슨 사고를 당했는지…우리는 육하원칙이 있지 않습니까"라고 비판했다). 세월호는 최초 신고보다 3분 후, 사고 해역과 가까운 진도관제센터(VTS)가 아닌 제주관제센터(VTS)에 교신해 배가 침몰 중임을 알렸다(8시 55분). 그리고 다시 이 제주관제센터(VTS)는 목포해경이 아닌 제주해경에 연락했고(8시 56분), 8시 58분에 비로소 목포해경이 사고를 접수했다(이 사고접수도 세월호 승무원들이 아닌 학생의 신고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에 추후 상황을 파악한 진도관제센터(VTS)가 9시 6분에 세월호와 교신하여, 세월호를 호출하여 직접관제를 시작하였다.[55][56][57]


항해 경로 Position on chart

사고 접수 후, 해양경찰은 출동 및 구조에 나섰다. 해경은 헬기 1대와 경비정 20척을 현장에 투입해 헬기로 승객 6명을 구조했고, 100 여명은 경비정에 옮겨 태워 인근의 진도 나 목포시 등지로 이송했다.[58] 대한민국 해군도 구조작업을 위해 사고 해역으로 유도탄고속함 1척과 고속정 6척, 해상초계가 가능한 링스헬기 1대 등을 투입했다.[59][60] 민간 어선 선장 박영섭(56)은 16일 새벽 조업을 마치고 귀항준비를 하고 있었다. 박 선장은 오전 9시 3분경 수협목포어업통신국이 송신한 긴급 구조 요청 신호를 받고, 병풍도 북쪽 1.5마일 해상에서 여객선 세월호가 침몰 중이라는 사실을 확인. 바로 뱃머리를 병풍도 쪽으로 돌렸다. 오전 10시 30분경 사고 현장에 도착한 박 선장은 해경과 구조작업에 참여해 승객 27명을 구조하였다.[61]조도면 청년회원 김형오(47) 역시, 이장단장으로부터 메시지를 받고 자신의 1.1t급 소형어선을 몰고 구조작업에 동참하여, 총 25명을 구조하였다. 그 외에도 메시지를 받고 10여분 만에 출항준비를 마친 조도면의 어선이 60여척, 어민은 150여명에 달했으며 전속력으로 도착까지 20여분이 소요되었다고 전해져 초동구조에 민간 어선들이 큰 역할을 하였음이 밝혀졌다.[62] 오전 9시 19분부터 YTN 을 시작으로 각 언론에서 세월호의 침몰 소식을 긴급 타진하기 시작했고, 오전 10시부터 대한민국 정부 는 여객선 침몰 사고에 대응하는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를 구성하여 가동에 들어갔다.[63] 또한 해양경찰특공대, 해군 SSU, 해군 UDT, 육군 특전사의 잠수요원들이 수색, 구조 작업에 투입되었다. [64] 그러나 조류가 거세 작업이 어려웠으므로, 정조 시간대에 맞춰 오후 6시 30분부터 잠수부 4명을 투입. 1차 수색 작업을 시작했다.[65] 20시가 되면서 실종자 수색 작업이 중지됐다. 대한민국 정부는 정조 시간대인 17일 1시 즈음부터 조명탄을 쏘아 수색을 재개했다. [66]


사고 수습 및 상황 (4월 17일~)


사고 발생 2일(4월 17일)

오전 10시 45분까지 집계된 총 사망자는 9명이었다. 오후에는 민간 잠수부가 실종자들을 수색하다가 파도와 바람에 휩쓸려 실종되었다가 20분 만에 낚싯배에 발견되어 구조되는 등 조류의 영향이 매우 심했다. [67] [68][69] 오후 8시 30분, 시신 1구를 추가 수습했다(사망 10명).[70] 10분 뒤, 서해지방해양경찰청은 굵어진 빗방울과 조류 때문에 중단했던 수중 수색을 재개한다고 밝혔다. 이때 선내진입을 위해 무인 로봇을 동원됐다.[71] 오후 11시 29분까지, 시신 8구를 추가 수습했다(사망 18명). [72][73][74]


사고 발생 3일(4월 18일)

오전 1시까지 시신 6구를 추가 수습했다(사망 24명).[75][76] 또한 이 시간부터 세월호를 인양할, 크레인 3대가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선체인양 작업을 시작할 시, 선체가 흔들려 에어포켓에 해수가 밀려들 위험성이 있다. 또한, 선체인양 작업의 의미는 사실상 구조작업의 포기에 가깝다. 따라서 선체인양 시작 시기에 대해서는 이 시간기준으로 정해진 바가 없었다. [77] 오전 1시 14분, 시신 1구를 추가 수습했다(사망 25명).[78] 오전 8시 경, 썰물로 완전히 잠기지 않고 남아있던 뱃머리 부분의 높이가 1m로 줄었다. 17일에는 2~3m 높이, 20~30m 정도의 길이였다. 이때부터 수면 위에 남아있던 선체 일부가 점점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79] 오전 10시 56분, 시신 1구를 추가 수습했다(사망 26명). 이 시신은 사고 선박 450m 인근 해역에서 발견되어, 시신이 멀리 떠내려갈 우려가 대두되었다.[80] 오후 12시 50분에는 시신 2구를 추가 수습했다(사망 28명). [81] 오후 3시 38분, 서해지방해양경찰청은 구조대 잠수요원들이 선내 2층 화물칸의 문을 여는데 성공했고 객실 진입은 시도 중이라고 밝혔다. [82] 그러나 곧 잠수요원들은 화물 때문에 진입로를 개척할 수 없었다. 오후 3시 56분, 가이드라인마저 끊어져 수색을 더 전개할 수 없어서 잠수요원들은 일단 철수하였다.[83] 이후 잠수요원들은 다시 3층 입구에 도착해, 진입을 재시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진입할 수 없었다.[84] 오후 11시 45분, 시신 1구를 추가 수습했다(사망 29명).[85]


사고 발생 4일(4월 19일)

오전 5시 50분경에 잠수 요원들이 3층에서 4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확보하는 도중 4층 객실 유리창으로 구명조끼를 입고 있는 시신 3구를 발견했다. 그들은 유리창을 파괴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86] 오후 11시 48분까지, 시신 4구를 추가 수습했다(사망 33명).[87][88][89][90]


사고 발생 5일(4월 20일)

오후 5시 까지 시신 25구를 추가 수습했다(사망 58명).[91][92][93][94][95]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세월호 침몰 사고와 관련, 경기도 안산시와 전남 진도군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다. [96]


사고 발생 6일(4월 21일)

오전 7시 20분까지 시신 5구를 추가 수습했다(사망 64명).[97] 다이빙벨에 대한 이종인 알파잠수기술공사 대표(낙관론)와 황대식 해양구조협회 본부장(비관론)이 대립한 가운데. 오후 12시 40분경, 이종인 알파잠수기술공사 대표가 바지선에 다이빙벨을 싣고 진도 팽목항에서 세월호 침몰 현장으로 출발하였다.[98] [99] 그러나 다이빙벨 사용은 곧 불허되었다. 정부는 "다이빙벨은 시야확보가 매우 제한적"이라면서 "격실구조가 복잡한 선체내부 수색의 경우 공기공급 호스가 꺾여 공기 공급이 중단될 가능성과 오랫동안 수중체류로 인한 잠수병에 노출될 위험성이 있다"고 이유를 밝혔다.[100] 오후 9시 15분까지, 시신 13구를 추가 수습했다(사망 87명).[101][102][103][104]


사고 발생 7일(4월 22일)

오후 7시까지 시신 26구를 추가 수습했다(사망 113명).[105][106] 또한, 22일부터 사흘 간 조류가 가장 느린 소조기였다. 이 잠수요원들은 24시간 집중수색에 돌입했다.[106] 잠수요원들은 식당과 노래방 등 편의시설이 있는 3층과 객실이 몰려 있는 4층 수색에 집중했다. 특히 승객이 많이 모여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3층 식당 칸 진입이 그들의 목표였다. 잠수요원은 21일에 오전 식당 칸으로 가는 진입로를 이미 개척했기 때문에, 식당 출입문 개방에 주력했지만 식당 옆 라운지에서 사망자를 발견했을 뿐 진입이 여의치 않았다. 해경 측에서는 "라운지와 식당 칸 사이에는 격벽이 있는데, 그것을 부수는 게 쉽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격벽을 뚫더라도. 뒤엉켜 있는 부유물은 수색 시간을 더디게 하는 2차 장애요인이며, 일부 구명조끼를 입지 않았던 탑승자들의 유실 가능성도 컸다. 수색이 집중 되더라도, 조류가 다시 빨라지기 전인 24일까지 구조를 완료하는 것도 불투명했다. 설치된 가이드라인 5개로는 1회 수색 시 2인 1조로 잠수부 10명만 투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황에 따라 가이드라인 5개를 추가로 설치할 수 있지만, 이를 위해서는 하루 이틀의 시간이 또 필요했다. 이미 일부 시신의 훼손이 시작되고 있었다. 시신이 훼손되면, 얼굴만으로 신원을 알아보기 어려워진다.[107] 오후 3시 40분, 우여곡절 끝에 식당 진입에 성공하였다.[108] 오후 9시까지, 시신 8구를 추가 수습했다(사망 121명).[109]


사고 발생 8일(4월 23일)

오전 10시 10분까지 시신 20구를 추가 수습했다(사망 141명). 시신은 주로 4층 전체 격실에서 대거 발견되었다.[110] 익일 진입하였던 3층 식당에는 한 명의 실종자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날은 3~4층 다인실을 중심으로 수색작업이 이루어졌다. 예상과 달리 식당보다 다인실 등 객실에서 실종자들이 다수 발견된 것은 침몰 사고로 선체가 기우는 등 이상 징후가 보이자 학생들이 급히 객실로 이동했고, 이후 '움직이지 말고 제자리를 지키라'는 선내방송을 듣고 객실에 머물다 빠져나오지 못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대책본부는 현재 3~4층 객실의 창문을 깨고 객실 사이 격벽을 뚫어가며 수색작업을 진행 중이다. 정부는 "3층과 4층 객실 중 아직 들어가지 못한 곳을 동시다발적으로 수색하고 있다"며 "배가 우현 90도로 누워있는 상황에서 선체의 위쪽, 즉 우현의 3~4층 방들은 거의 탐색이 끝난 상태이며, 현재 중간에 위치한 방들을 탐색하기 위해 잠수사를 투입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해상에서는 해경, 해군 함정외에도 저인망 어선들을 외곽에 배치해 실종자 유실 가능성에 대비하는 중이었다. 수색에 도움이 되는 다관절 해저로봇과 영상음파탐지기도 투입하기로 하였다. 오전 11시까지 시신 9구를 추가 수습했다(사망 150명).[111] 수색상황은 호전됐지만, 선내 깊숙한 곳의 수색은 장비의 한계로 딜레마에 빠졌다. 가이드라인 설치가 일정부분 충족됐지만, 선내 깊숙한 곳을 수색하 데는 장비와 잠수요원들의 물 속 작업시간 한계를 극복해야 했다. 산소통이 아닌 외부 공기 공급장치(에이컴프레셔)를 통해 몸에 연결된 공기호스로 물 속에서 호흡하는 머구리들은 입수 지점부터 수색대상 지점까지 도달할 수 있는 거리가 짧아 수색에 어려움을 겪었다(공기 공급장치 호스의 최대 도달거리는 100m이며 공기공급장치에서 선체까지가 55~70m이므로 선체 안에서는 약 30~40m 밖에 움직이지 못한다). 또, 조류로 공기호스가 늘어질 경우엔 도달거리는 더욱 짧아질 수 밖에 없었다. 반면에, 공기통을 등에 메고 잠수하는 스쿠버 다이빙 방식은 짧은 작업시간이 한계였다. 이들의 작업 제한 시간은 약 20분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112] 오후 11시까지 시신 9구를 추가 수습했다(사망 159명).[113]


사고 발생 9일(4월 24일)

오후 7시까지 시신 16구를 추가 수습했다(사망 175명).[114] 이날은 수색에 가장 적합한 소조기의 마지막 날로, 오후부터 유속이 빨라지기 시작하기에 수색 작업에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예상했다. 해군은 24일 여명 이후 조명탄 900발을 동원한 합동구조팀이 조명탄 900여 발을 준비, 야간에도 구조 및 수색작업을 이어갈 계획이라 밝혔다.[115] 사람들은 잔잔한 물살 때문에 혹시 성과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지만, 생존자 소식은 여전히 없었다. 해군은 다관절 탐사 로봇인 크랩스터를 투입, 사고 후 최초로 선체 전체에 대한 초음파 영상을 촬영했다. 그러나 이 영상을 수색에 활용하려면 분석 등에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었다.


사고 발생 10일(4월 25일)

수색은 3층 앞쪽 객실과 4층 객실이 중심이었다. 4층 뒷부분 단체객실에는 사고 당시 학생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3층 뒤쪽 객실은 탈출한 선원들이 사용하던 곳이어서 수색에서 제외됐다. 세월호는 이미 왼쪽으로 90도 기운 채 가라앉은 상태였고, 선박 왼쪽은 해저면에 닿아 있고 오른쪽이 수면을 향한 상태였다. 수색팀은 세월호 위에 떠 있는 바지선에서 세월호의 오른쪽 창문 등 주요 진입지점으로 연결된 가이드라인을 이용, 한 번에 잠수부 6~8명을 투입시키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익일에 이어 오전까지 3, 4층 우현 객실 수색을 모두 마치고 복도로 수색 범위를 넓혔다. 복도로 향한 우현 객실문을 열거나 창문을 깨고 진입했다. 일부 중앙 객실 진입에도 성공해 수색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시신 10구를 수습했다(사망 185명).[116] 그러나 일부 중앙 객실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선체가 기울어져 발 아래쪽에 있는 중앙 객실문을 당겨서 열어야 했고, 캐비닛 등 이물질이 문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부유물과 시계 역시 문제가 되었다. 사고 당시 배 왼편부터 물에 잠겨 좌현 객실에 시신이 다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설상가상 유속이 느린 소조기가 끝나 다시 매일 초속 0.1~0.2m씩 유속이 빨라지기 시작할 것으로 전망되었으나, 이를 극복할 별다른 대책이 없는 상태였다. [117]


사고 발생 11일(4월 26일)

0시 50분경 3층 중앙식당에서 시신 2구를 추가로 발견해 수습했다(사망 187명).[118] 기상 상황이 전날보다 좋지 않아 조류와 파고, 풍속이 전날보다 많이 강해졌고 밤부터는 비까지 오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새벽에 다이빙 벨을 투입하려고 했으나 설치하는데 실패했고, 끝내 팽목항으로 철수했다. 조류가 강해지는 중이라 다이빙벨을 사용하려면 4월 28일 이후에나 가능할 거 같다고 한다. 또, 선내에 있는 물건들 때문에 수색 작업 자체에 난항을 겪고 있다고 한다.[119] 미국 해군 구조함인 세이프가드 함이 새벽이 도착해 구조 활동을 도울 예정이었으나 물품 수급 문제 때문에 중간기지에 들리게 되어 몇 시간 지난 뒤에 도착했다.[120]


사고 발생 12일(4월 27일)

14시경 선내에서 시신 1구를 수습하는데 그쳤다(사망 188명).[121] 팽목항뿐 아니라 사고 해역도 바람이 거세게 불면서 다시 유속이 빨라지고 있으며, 조류, 시야를 다 뚫고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객실 안으로 들어가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잠수사들은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나오고 있는 대안이 먼저 용접을 통해서 벽면이나 문을 뜯어내고 들어가는 방법, 또 하나는 소량의 폭약을 사용해서 뚫고 들어가는 방법 두 가지이다. 하지만 문제는 자칫 폭약이나 용접 방법을 쓸 경우 가까이 붙어 있던 시신이나 혹시나 생존해 있던 사람이 다칠 위험이 있으므로 해군은 이런 방법은 가족들의 동의가 선결된 다음에 쓰겠다는 방침을 정한 상태이다. 그 밖에 풍랑예비특보가 오전에 내려졌고, 오후에는 풍랑주의보로 격상되었는데, 이 해역에 풍랑주의보가 내려진 건 이 날이 처음이었다.[122]


사고 발생 13일(4월 28일)

14시 10분경 단원고 남학생으로 추정되는 시신 1구를 수습했다(사망 189명).[123] 해경이 침몰당시 최초 구조상황 영상을 공개했으며, 기관직의 8명은 뒤쪽으로, 항해직 7명은 조타실로 탈출한 모습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중앙수사본부가 카카오톡의 압수수색을 통해 확인한 결과, 세월호에서 나온 마지막 카카오톡 메시지는 10시 17분에 학생이 보낸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시간은 세월호가 90도로 기울어져 침몰하던 순간이었다.[124]


사고 발생 14일(4월 29일)

민관군 합동구조팀은 이날 세월호 5층 로비와 4층 선수 좌현 방 등을 수색했고, 그 결과 오후 4시까지 사망자 16명의 시신을 추가로 수습했다(사망자 205명).[125] 박근혜 대통령은 이 날 8시 55분경 안산 화랑유원지를 방문해 조문하였다. 박 대통령은 조용하고 차분한 가운데 추모의 뜻을 전하고 유족을 위로하기 위해 일반인의 조문이 시작되기 전에 일찍 분향소를 찾은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이번 사고에 대한 사과 없이 떠나자 일부 유족들은 분향소 한 가운데 큼지막하게 놓여있는 박 대통령 등 고위 공무원과 정치인들의 조화를 치울 것을 요구했다. 결국, 박 대통령, 강창희 국회의장, 정홍원 총리,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최고위원, 강병규 안전행정부 장관, 이주영 해양수산부 장관 등의 조화는 모두 밖으로 치워졌다.[126] 또한 방송에 공개된 분향소 방문 장면에서 박 대통령이 위로한 할머니가 유가족이 아닌 정부 측이 동원한 인물로 해당 장면이 연출되었음이 밝혀졌다.[127]


사고 발생 15일(4월 30일)

15시 44분경까지 7명의 시신을 추가로 수습했다(사망자 212명).[128] 사리 기간이지만 기상 상황은 좋은 편이라서 파도가 전날보다 약하다는 전망이 나왔다. 한편, 이종인 대표의 다이빙 벨은 정조시간인 새벽 2시 39분을 전후해 투입을 시도,[129] 2시 55분께 버팀줄 선체 이음매 조이기에 성공했으나, 버팀줄에서 선내 진입구까지 단거리 유도선 설치에 실패했다. 높은 파고로 알파 바지선의 가로·세로 움직임이 컸기 때문이라고 한다.[130] 오후 3시 45분에 다이빙벨을 선미 쪽에 투입했지만 투입 과정에서 잠수부 1명의 공기호스가 다이빙벨 운용 와이어에 씹혀 터지는 바람에 다이빙벨은 투입된지 28분만에 밖으로 건져졌다.[131]


사고 발생 16일(5월 1일)

전날과 마찬가지로 4층 뱃머리 좌측과 5층 로비를 집중 수색을 했고, 그 결과 희생자 9명이 추가로 발견되었다(사망자 221명). 물살의 흐름이 빠른 사리 기간이여서 구조 작업이 여의치 않고, 선체로 진입해도 여러 부유물로 가로막혀 문을 열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구조팀은 일단 주요수색 대상 객실 64개 가운데 44개 객실에 대한 수색을 끝마친 상태이다.[132] 그 날 새벽, 사고 해역에 다이빙벨을 투입한 뒤 잠수부 두 명이 세월호 선내에 진입해 각각 20여 분씩 수색작업을 벌였지만 실종자들을 찾지는 못했다. 선내 진입에 성공했지만 기존에 설치된 가이드라인들이 많아 작업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이후 이 대표는 오전 11시쯤 사고 해역에서 바지선과 다이빙벨을 철수시켰으며, 이 대표는 실종자 가족들에게 죄송하다고 말했다.[133]


사고 발생 17일(5월 2일)

16시 15분경까지 7명의 시신을 추가로 수습했다(사망자 228명).[134] 당일 서울에선 지하철 추돌사고까지 겹쳤고, 생사를 알지 못하는 실종자 수는 74명이 남아 있었다. 실종자 가족들이 가이드라인이 6개인데 왜 4개팀씩 밖에 잠수를 못 하느냐고 묻자, 해경은 잠수 요원의 통신기가 고장 났다고 밝혀 가족들이 실망하기도 했다. 도면과 실제 배 구조가 달라서 수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며, 검경합동수사본부도 도면과 실제 구조가 다르다는 관련자의 진술도 확보하고 불법 구조 변경에 대해서 수사하고 있다. 또, 수색 기간이 길어지면서 잠수 요원들의 피로도 많이 쌓이는 상황인데, 대책으로 민간 잠수요원들을 모집하고 있다고 한다.[135]


사고 발생 18일(5월 3일)

16시 50분경까지 8명의 시신을 추가로 수습했다(사망자 236명).[136] 조류가 센 사리기간이 끝남과 동시에 1차 수색이 끝나는 날이다. 민관군 합동구조팀은 새벽 정조 시간에 맞춰 잠수 수색을 위해 대기했지만 사리 기간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드센 조류에 잠수를 하지 못했으며,[137] 12시 10분경에 2명의 희생자를 수습하면서 수색을 재개했다. 구조팀은 세월호 선체 111개 격실 중 실종자가 남아 있을 것으로 보이는 64개를 우선 수색 대상으로 삼고 있다. 야간에는 구조팀 99명이 투입돼 4층 선수 중앙 격실을 계속 수색하는 한편, 1차 수색을 마친 3층 중앙부와 4층 선미 다인실을 재수색할 계획이다. 해상에서는 조명탄과 어선의 조명을 지원받아 함정 139척, 민간선박 759척이 그물망식 수색을 진행할 예정이다. 대책본부는 쌍끌이 어선, 닻자망, 낭장망, 안강망 등을 이용해 시실 유실 방지를 위한 3중 저지망을 설치한 상태다. 하지만 가방과 슬리퍼, 잠옷 등이 사고해역으로부터 최대 30㎞ 밖에서 잇따라 발견됨에 따라 시신 유실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다. 수색작업이 장기화되면서 시신 훼손 우려도 커지고 있다. 이에 따라 대책본부는 시신 훼손 최소화를 위해 냉매제 500개를 긴급 확보했으며 희망 가족을 대상으로 시신 외모를 복원하는 서비스도 지원하고 있다.[138]


사고 발생 19일(5월 4일)

18시 11분경까지 12명의 시신을 추가로 수습했다(사망자 248명).[106] 객실 수가 많은 4층 중앙 뱃머리쪽을 수색하면서 한 차례 수색을 마친 3층 중앙과 4층 뱃머리쪽을 다시 한 번 수색할 계획이라 밝혔지만,[139] 오후 들어 바람이 세지고 파고가 높게 일면서 수색 작업에 차질을 빚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106]



수습방법

해상 및 공중

16일 사고 발생 초기에는 침몰된 세월호 부근에서 선박을 통한 해상구조와 헬기를 통한 공중 수색구조가 주를 이루었다. 특히 초동구조에 민간 어선들이 큰 역할을 하였다. [140] [141]


잠수요원

잠수요원들은 우선 수면에서 선체까지 가이드라인(유도선)을 연결한다. 이 선은 빠른 유속과 가시거리가 10~20cm에 불과한 사고 현장에서 잠수요원들이 안전하게 선체까지 내려갈 수 있도록 해주는 일종의 길이다. 물속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선을 연결하기 위해서는 손으로 짚어가며 움직여야 한다. 또한, 빠른 유속 때문에 유도선을 연결하더라도 선끼리 꼬일 수 있고(꼬이면 다시 설치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잠수요원의 마스크까지 벗겨질 수 있다. 꼬인 선을 정리해가며 선체로 진입이 가능한 선실과 화물칸 입구, 조타실 등에 도달한다. 그리고 선을 그곳에 매어 놓으면, 그때부터 선체진입을 본격적으로 시도한다. 진입 입구를 확보하고, 다시 자신의 몸의 생명줄을 이은 뒤, 선체 내부로 진입을 시도한다. 선체 안은 칠흑 같은 어둠 속이므로 방향을 잃게 되면 선체 내에 고립되어 생명이 위험하기 때문이다. 선체로 진입 후에는 휴대 조명 장비로 매우 혼란스러운 선체 내부를 일일이 눈으로 수색해야 한다. 그러나 수심에서의 작업시간은 최대 30분에 불과하여, 잠수요원에게 주어진 시간은 짧다. 따라서 고도로 훈련된 일부 잠수요원만이 작업에 참여할 수 있는 한계가 있다. [142] 또, 잠수요원들이 산소를 공급받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산소통을 통해 산소를 공급받는 스쿠버 다이빙 방식이며, 둘은 공기호스가 연결된 다이빙 헬멧을 통해 산소를 공급받는 머구리 방식이다. 세월호 침몰 사고에서, 16일 대한민국 정부는 머구리 방식은 탁 트인 수중에서 수중 작업을 위한 용도이며, 세월호의 선체를 굽이굽이 들어가서 작업하려면 생명선이 꼬이거나 절단될 위험이 있다며 스쿠버 다이빙 방식을 고수하려 했다. 스쿠버 다이빙 방식은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만 작업할 수 있다. 수심 30 미터에서 수면으로 올라오는데, 잠수병의 문제로 천천히 부상해야 하기 때문에 소요되는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급부상을 브라보라고 하는데, 이 경우 잠수병으로 사망할 수 있다. 실종자 가족들은 지속해서 머구리 방식을 주장했다. 머구리 방식은 그만큼 잠수병 확률도 높지만, 머구리들이 다이빙 헬멧을 쓰고 서해 40미터 해저 바닥을 3시간 동안이나 걸어다니면서 키조개를 캘 수 있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작업 한계는 20~30분이 아닌 3시간이다. 결국, 정부는 투입에 반대하다가 투입을 허가했는데, 머구리들이 투입후 선체 내부 진입에 최초 성공하는 등 상당한 성과를 내기 시작해 22일부터 세월호 침몰 사고의 구조방식이 머구리 방식으로 전환되었다.[143][144]


공기주입 및 리프트백 설치

공기주입은 선체 내에 공기호스를 주입하여, 혹시 모를 선내 생존자들의 생존시간을 늘리는 역할과 부력을 유지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물체가 물 위에 뜨기 위해서는 중력에 상응하는 부력이 작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공기는 부력을 증가시켜줄 수 있다. 따라서 일종의 부력주머니인 리프트백과 공기주입을 정부는 추진했다. [145] 그러나 이러한 조치에 대하여, 알파잠수기술공사 이종인 대표는 이해가 잘 안된다고 논평했다. 공기주입은 사람이 있을 만한 곳에 해야 함에도, 제일 상갑판인 조타실에 공기주입을 했다는 주장이다. 또한, 조타실의 구조적 특성을 근거로 공기가 주입되어 다른 쪽으로 공기가 퍼져 에어포켓을 형성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부정했다. 그는 오히려 공기주입은 일단 조사 후, 식당 등 사람이 살아 있을 확률이 있는 곳에 해야한다고 지적했다. 또, 18일 진행된 정부의 리프트백 설치 양상이 단지 배가 거기 있다고 표시하는 어떤 풍선처럼 돼 있을 뿐, 어떤 부력을 작용하는 효과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146]


선박인양

세월호 인양 작업은 규모와 기술 면에서도, 해양사고 수습의 최고 난제다. 세월호는 한국에서 운항 중인 여객선 가운데 최대인 6천825t급이다. 2010년 침몰한 천안함(1천200t급)과 비교하면 5배 이상 무겁다. 작업에는 대형 해상 크레인 4대와 플로팅 독 1대 등 세계 최고의 선박 건조능력을 갖춘 국내 조선소의 장비와 구난업체 등 전문 인력이 대거 투입된다. 선박 전문가들은 시야가 20㎝ 정도에 불과한 수중에서 다이버가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조류를 이겨내는 것을 인양 성공의 관건으로 꼽는다.


세월호가 침몰한 지점의 수심은 37m다. 설상가상으로 해당 지점 조류는 이순신 장군이 대승을 이뤘다는 울돌목 다음으로 조류가 센 곳이다. 이번 인양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1차 작업은 세월호의 위치를 바로잡는 것이다. 세월호는 왼쪽으로 기울다가 180도 가까이 뒤집힌 채 침몰했다. 해상 크레인 4대가 완벽하게 호흡을 맞춰 선체를 인양하려면 선체의 바닥 부분이 안정돼야 한다. 인양팀은 수중에서 선박에 구멍을 뚫어 무게중심을 바꾸는 방식으로 위치를 바로잡는 등 선체를 안정화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작업이 마무리되면 선체의 어느 지점에 체인을 연결할지 정하고, 다이버들이 해당 지점을 받쳐 줄 체인을 연결한다. 세월호의 길이는 145.6m이므로, 최소 10개 정도 지점에 체인이 설치돼야 선체를 지탱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체인의 무게만 수백t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사고 발생 사흘째 오전이 지나도록 선체에 진입을 못 할 정도로 조류가 강하다.


안정화와 체인연결이 되더라도 해상 크레인들은 한 몸처럼 움직여야 한다. 서로 호흡이 맞지 않으면 애써 들어 올린 선체가 다시 침몰할 수 있고 해상 크레인이 붕괴될 위험도 있다. 체인을 와이어로 연결한 해상 크레인은 세월호를 수직으로 인양하게 되는데 이때 선체는 수면 위로 12m 이상, 수중에 잠긴 부분은 10m를 넘지 않아야 한다. 이런 수준을 유지해야 하는 이유는 바다 위에서 선박을 건조할 수 있는 장비인 플로팅 독(Floating Dock) 위에 세월호를 얹어 이동하기 위해서다. 플로팅 독 속에 물을 채우면 가라앉고 물을 빼면 떠오른다. 육상에서 만든 선박 블록을 이곳으로 가져와서 조립하고 나서 플로팅 독을 가라앉히면 선박을 물에 띄울 수 있다. 세월호는 선박 블록처럼 플로팅 독으로 옮겨지게 된다. 2010년 천안함 인양 때도 이 방식이 사용됐다.그러나 이 과정 역시 만만치 않다. 해상 크레인이 세월호를 인양, 플로팅 독으로 옮기는 동안 닻이 플로팅 독의 모서리를 고정하는 역할을 하는데 조류와 바람 등 기상 조건이 변수다. 플로팅 독의 이동 오차는 5m 이내여야 한다.


침몰한 선박을 인양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수중에 있는 구조물은 선박 운항의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이기 때문에 제거해야 한다. 둘째, 선박 침몰의 결정적인 원인이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고 선박을 인양한다는 것은 결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통상적으로 인양을 결정했다는 것은 인명구조를 마쳤거나 이를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인양 과정에서 선체가 크게 흔들릴 수 있다. 이 경우 선체 내부에 공기가 남은 공간 이른바 '에어포켓'으로 해수가 밀려들어 생존자들이 위험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국은 이날 실종자 가족 동의 없이는 세월호를 인양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천안함 사건 때 함미 부분은 사건 발생 21일 만에, 함수 부분은 30일 만에 각각 인양했다. 세월호 인양에는 최소 한 달 이상 걸릴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147]


수습변수

조류 및 가시거리

선박을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승객들을 구조하기 위한 방법은 잠수요원 투입이다. 잠수요원은 선박인근 및 선박내부를 수색한다. 그러나 맹골수도의 특성상 조류가 빠르고, 가시거리가 10~20cm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잠수요원들도 안전을 담보할 수 없어 구조에 어려움을 겪었다. [148]


기상

기상 역시 사고 수습을 더디게했다. 심지어 17일 오후에는 기상상황이 나빠져 구조가 중단되기도 하였다. [149]


저체온증

박준범 순천향대학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10도~15도 사이의 물에 사람이 한두 시간 정도 있게 되면 이미 의식을 잃어요. 체온이 떨어지면서. 한두 시간이 지난다면 굉장히 위험한 상태에 빠진다고 할 수 있고요"라고 언급하였다. 위급한 상황에는 심장기능에 이상이 생기면서 맥박이 느려지는 서맥과 심방 및 심실세동, 심하면 심장정지까지 올 수 있다. 체온이 떨어지면 인체는 근육을 통해 열을 내 온도를 유지하려고 하기 때문에, 근육양이 낮은 고령자나 만성질환이 있는 사람은 특히 위험할 수 있다. 저체온증상태가 되면 구조과정에서도 작은 충격으로 심한 부정맥이 오거나 출혈이 생기기 쉬워 주의를 요한다. [150]


에어포켓

그나마 일부 전문가들이 희망을 걸어볼 수 있는 것으로 지적하는 것은 에어포켓이다. 정창두 서울대 조선해양공학 명예교수는 배가 완전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지 않고, 떠있는 이유를 "컵을 물속에 엎어놓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기가 빠져나가지 않았고, 다행히 선수 부분은 손상이 없기 때문에 공기가 갇혀 있는 거죠. 소위 에어포켓이 형성되어있습니다"라고 설명하였다. 이 에어포켓에 공기가 8㎥가량 있다고 가정하면, 마지노선은 최대 72시간으로 계산된다[151]. 한편, 가라앉지 않은 부분에 의해 추산되는 선내 공기량은 500~1000 세제곱미터 였다. 다만, 이 에어포켓이 승객이 있는 3~5층에서 얼나마 형성되어 있을지는 추산된 바가 없다. 대서양에서는 선박전복 사고 후, 선원이 에어포켓에서 60시간을 버티다가 구조된 사례가 있다. [152]


격실

격실이란 사고의 파급을 방지하기 위해 격리시켜 만든 공간으로 대부분의 선박은 이 격실들을 갖추고 있다. 한국해양대학교 공길영 교수는 “지금 상황은 천안함 상황과 매우 비슷하다”며 “실종자들이 생존해 있으려면 수밀격실이 돼야 하는데 배에 전원 공급이 중단되고 급격히 뒤집히는 대 혼돈 속에서 문을 닫는 조치가 취해져있을지 비관적이다"고 말했다. 격실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문을 닫는 조치가 취해져야 하며, 격실에 에어포켓이 있다면 이론적으로 48시간을 버틸 수 있다. [153]


책임론

 이 부분의 본문은 세월호 침몰 사고의 책임입니다.

승객들을 선박에 두고, 1차 탈출한 선박직 승무원들에 대하여 사회윤리적 책임이 거론되고 있다. 이러한 비판은 세월호 사고의 공학적·물리적 분석에 따른 직접원인 보다 근본원인을 지적한다. 선박이라는 한 집단의 범위 내에서는, 선장 등 선박직 승무원들이 항해와 승객 구조임무 책임을 지닌 리더인데, 그들의 리더십 부재가 세월호라는 한 집단의 침몰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몇 가지 근거로, 충분한 탈출 가능시간이 있었음에도(약 2시간) 승객들에게 "움직이면, 위험하니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과 해경에 구조요청을 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시기적절한 유효 조치가 없었다는 점. 오히려 방송 지시의 합리성에 의문을 품고 구명조끼를 착용한 뒤, 탈출을 시도했던 승객들이 생존율이 높았다는 점. 해당 선장등 선박직 승무원들이 승객들을 뒤로하고 1차 탈출했다는 점을 든다. 따라서 이 분석은 인명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던 문제가 리더들의 판단착오와 책임감 부재로 인재(人災)가 되었음을 지적한다. [154][155][156] 한편, 세월호 선원들이 침몰사고 직전 자신들만 아는 통로를 이용해 배에서 탈출했다는 정황이 드러났다.[157]


2014년 4월 17일 오후 9시에 인천항에서 청해진해운 대표 김한식 대표가 나와 대국민 사과를 하였다.[158]


대한민국 사회

세월호와 대한민국 사회를 유비추론한 사회 전반의 책임론이 대두된다. 조선일보 이종현 기자는 "침몰하는 세월호는 한국 사회의 축소판"이라며, 세월호의 핵심승무원들이 승객들을 남겨두고 먼저 탈출하는 모습을 위기에 처하면 몰래 빠져나가는 재벌 회장, 국회의원 같은 한국 사회지도층의 모습과 닮은꼴이라고 지적했다. 실종자 가족들이 해경과 해군을 믿지 못하고 민간 잠수부 투입을 강하게 요구했다는 점, 해경이 민간 잠수부 투입을 막고 조롱했다는 근거 없는 이야기가 정부의 공식 발표보다 더 힘을 얻는 상황이 반복된다는 점에서 이는 정부 스스로 권위와 신뢰를 잃은 결과라 지적했다.[159]


반응 및 여파


중앙정부

대한민국의 박근혜 대통령은 4월 16일 13시에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긴급 방문하여 10여 분간 침몰 사고에 대한 보고를 받고 "일몰까지 시간이 없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며 구조에 최선을 다할 것을 지시했다.[160][161] 이어 박근혜 대통령은 17일 오후 전남 진도군 진도읍 실내체육관에 방문했다. 실종자 가족들이 구조 미흡을 언급하며, 오열·호소하자 "마지막 한 분까지 구조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오늘 이 자리에서 지키겠다고 한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여기 있는 사람들 책임지고 물러나야 합니다." 등의 말을 남겼다.[162]


지방자치단체

순천시는 2014년 4월 20일 순천만정원 개장에 앞서 4월 19일 정홍원 국무총리와 중화인민공화국 닝보 시 예술단, 유명 가수 등 여러 유명 인사들을 초청하여 개막식을 열려고 하였으나 4월 16일 세월호 침몰 사고로 인해 애도 차원에서 전면 취소한다고 밝혔다.


피해자 가족들

사고 발생 3일(4월 18일) 오전, 실종자 가족들이 오전 전남 진도 실내체육관에서 "정부의 행태가 너무 분한 나머지 국민들께 눈물을 머금고 호소하려 한다"며 대국민 호소문을 발표했다.[163] 또한 사고 발생 5일(4월 20일), 진도실내체육관과 팽목항(진도항)에 있는 일부 실종자 가족들이 새벽에 청와대를 항의 방문하려 했다. 이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약속과 달리 수색에 대한 진척이 없다고 했다. 한 실종자 가족은 "우리의 요구를 전달하려는데 해경청장도 전화를 받지 않고, 정부 종합상황실 책임자도 연결이 안 됐다"며 "우리가 바라보는 현재 상황은 비상사태인데 누구와도 연락이 되지 않는다. 이제 누구를 믿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이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하나밖에 없다"며 "청와대로 올라가서 서울시민에게도 알리고, 대통령에게도 보여줘야 한다. 청와대로 갑시다"고 말했다.[164] 그러나 경찰이 이들의 행진을 저지하면서 대치 상황이 벌어졌다.[165] 실종자 가족 중 변호사 한 명이 경찰에게 자신들을 막아선 법적근거가 무엇이냐고 묻자, 경찰은 안전문제라고 답했다. 얼마 뒤 정홍원 국무총리가 도착해 실종자 가족들을 만났으나, 항의가 계속되자 오전 3시 50분 경, 차에 올라탔다. 이에 분노한 실종자 가족들이 정홍원 국무총리의 차가 떠나지 못하게 막아섰다. 오전 5시 10분, 실종자 가족들 중 일부가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갓길로 빠져나와 서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경찰이 다시 막아서 또 대치 상황이 벌어졌다.[166] 얼마 뒤, 실종자 가족들은 정홍원 국무총리의 차를 막지 않고 보내주었다.[167] 사고 발생 7일(4월 22일), 오전 10시경에는 생존자 학부모들이 안산시 단원구 고잔동 안산교육지원청 앞에서 대국민 호소문을 발표했다.[168]


대한민국 국민들

대한민국 국민들은 사고발생 후 많은 일들을 하였다. 전국에서 쏟아지는 위문품에 진도우체국은 거의 마비가 됐다. 4월 22일까지 진도우체국에 도착한 위문품은 등기로 온 것만 3천 300상자. 일반우편으로 온 것은 집계가 불가능할 정도로 많았다. 우체국의 한 직원은 "주로 학교에서 보내오는 물품이 70% 정도 된다. 여성단체나 봉사단체에서도 많이 보내오고 있다"면서 '기적처럼 태어났으니 기적처럼 돌아오라'라는 감동적인 문구도 적혀 있다"고 말했다. 이어 "평소 하루 8t 트럭 1대 정도 처리하는데 요즘은 4대도 넘는다. 진도군민을 대신해 국민들의 마음에 정말 감사하고 몸이 고되지만 그건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위문품은 진도군청 주민복지과로 보낸 뒤 현장 자원봉사자에게 전달된다. 사고가 발생한 진도와 인근 도시인 목포 시민도 구조대와 사고 현장에 나온 취재진에도 호의를 베풀었다. 목포에서 사업을 하는 서미자씨는 사고 첫날부터 일주일째 인근 서망항에서 무료로 음료를 나눠주는 봉사를 하고 있다. 진도군 주민 김문환씨도 사고 현장의 잠수사들을 위해 지인들에게 부탁해 빵과 음료, 바나나, 생수 등을 손수 포장해 보냈다. 진도읍의 한 상점 문에는 '문 닫은 시각이라도 물건이 필요하다는 전화를 주면 나오겠다'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목포시도 승무원 박지영(22·여)의 빈소를 마련해 주고, 생존자들에게 구조금 10만원씩을 전달했다.[169]


세월호 현장에서 청소와 빨래를 맡는 자원봉사자들도 있었다. 진도 실내체육관에 자원봉사자들이 몰려와 실종자 가족들을 위한 식사와 물을 준비했다. 대한적십자사 전남지부장 박춘심(59)은 "부모들은 얼굴만 봐도 부모라는 걸 알 수 있다"면서 "입이라도 축이라는 말조차 붙일 수가 없다"고 안타까워 했다. '세탁해드립니다'라는 푯말을 들고 조용히 가족들 사이를 다니며, 장기간 세탁을 못한 가족들을 위해 빨래를 돕는 자원봉사자도 있었다. 의료단체도 진도로 몰려들었다. 의료진들은 체육관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실신하거나 진료가 필요한 가족들의 상태를 살피고 즉각 링거 수액 등 의료 조치를 취하고 있다. 특히 가족들의 경우 심각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이에 서울대병원 등은 체육관 뒷편에 심리상담실을 비롯한 현장응급의료소를 마련했다. 의료소 천막 안에는 가림막이 세워져 있고, 필요한 사람들은 24시간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가족들이 머물 임시 거처를 마련하고 운동복과 세면도구 등 생필품과 각종 식음료를 비롯한 구호물품을 곳곳에 비치했다. 긴급한 전화를 걸 일이 생기는 가족들을 고려한 휴대전화 충전 서비스, 공기 주입기로 바람을 넣는 일회용 베개, 정신력과 체력이 고갈되는 가족들을 위한 청심환이나 각종 비타민 등 종류도 가지각색이었다. 이런 가운데 체육관에서는 "정부가 못하는 것을 민간 단체와 자원봉사자들이 하고 있다"는 말까지 나왔다.[170][171] 서울에서 터키 식당을 운영하는 4명의 터키인은 4월 24일 "사고 소식을 듣고 케밥으로라도 돕고 싶다는 마음에 한국인 직원들과 진도로 왔다"고 말하며, 케밥을 체육관 안까지 직접 나르며 5시간 동안 봉사활동을 벌였다.[172]


개인택시 안산시 조합 소속 2000여 명 가운데 800여 명은 사고 다음날인 17일부터 안산, 시흥, 수원 등 장례식장 16곳이나 분향소를 가는 유족과 학생을 무료로 태우는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안산에서는 하루에 20대씩 오전 9시부터 오후 8시까지 운행하며 추가로 10대가 진도체육관과 팽목항, 목포 등에서 24시간 대기하다가 안산시 상황실에서 연락이 오면 유족을 태워 안산까지 실어나르고 있다. 한국자유총연맹 안산시지회도 안산시가 마련한 버스를 타고 진도에서 안산 분향소로 올라온 유족들을 승합차로 자택까지 실어나르는 자원봉사 활동을 펴고 있다.[173] 또, 이들은 택시 40대로 영정과 위패를 든 유족을 안산올림픽기념관(임시분향소)에서 합동분향소로 이송하였다.[174]


세월호 사건에 대한 국민들의 슬픔·분노 지수는 평균 83.8에 달한 것으로 밝혀졌다.[175]


노란 리본 캠페인

 노란 리본, 노란 리본 달기 캠페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세월호 침몰 사고 희생자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이른바 '노란리본 캠페인'이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통해 널리 확산되고 있다. 노란 리본 이미지에는 검정색으로 그려진 리본 문양과 함께 '하나의 작은 움직임이 큰 기적을'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176]


방송사

KBS, MBC, SBS, JTBC는 예정된 프로그램을 결방하고 뉴스 특보와 특집 뉴스를 방영했다. KBS는 오전 10시부터 1TV에서 특집 뉴스와 특보를 내보냈고, 2TV에서는 수목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이 결방됐다. MBC도 오후 6시 20분부터 'MBC 뉴스특보 진도 해상 여객선 침몰'과 '특집 MBC 뉴스데스크'를 방송했으며 드라마와 예능프로그램들은 결방한다고 말했다. JTBC 역시 기존 정규방송을 중단한채 특보와 '특집 JTBC 뉴스 9'을 편성하였다. SBS 역시 기존 프로그램을 결방하고 SBS 8 뉴스를 두 시간으로 편성해 특집 방송을 했다.[177][178]


유명인 및 단체

사고와 관련하여, 여러 단체 기업 및 유명인들의 많은 기부가 있었다. 넥슨 (10억), 중기중앙회 회장 김기문 (10억), 이수만 (5억), SM 엔터테인먼트 (5억), 양현석 (5억), 최병오 형지회장 (5억), 시몬스 침대 (5억), 김수현 (3억), 권혁 시도쉬핑 홍콩 고문 (3억), 치과의사협회 (2억), 강호동 (1억), 장병권 홈캐스트 부회장 (1억), 설경구 송윤아 부부 (1억), 축구선수 박주영 (1억), 최경주 (1억), 교촌치킨 (1억), ING생명 (1억), 한국감정원 (1억), '관상' 제작사 대표 (1억), 야구 열개구단 감독·코칭스태프 (1억), 몽드드 (1억), 한국지멘스 (1억), 한국타일도기상사 대표 (1억), 이휘재 (1억), 피겨스케이팅 선수 김연아 (1억원), 연예인 하지원 (1억원)[179], 송승헌 (1억원), 차승원 (1억원)[180], 타이거 JK (1억원)[181], 박신혜 (5천만원)[182], 주상욱 (3천만원), 정일우 (3천만원)[183] , 오연서 (1천만원)[184], 온주완 (1천만원)[185] , 김보성 (1천만원)[186], 장미인애 (500만원)[187] 야구 선수 류현진은 1억 원을 기부하는 동시에,[188] [189] 클럽하우스에 이를 추모하는 글귀를 붙이고 등판하였다. [190]


유명인만 기부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에 있는 백산고등학교 2학년 2반 학생들은 JTBC로 성금을 보내오기도 했다.[191]


스포츠계

축구 선수 김보경 (잉글랜드 바클레이스 프리미어리그에 카디프 시티)[192], 손흥민 (독일 1. 분데스리가 바이어 04 레버쿠젠)은 애도를 뜻하는 검은 완장을 차고 경기에 임하였다.[193] 또한 지소연 (잉글랜드 첼시 레이디스 FC)도 검은 완장을 차고 경기에 임하였다. 이 외에도 K-리그 리그 경기에서도 골을 넣은 선수들(이동국 (전북현대 모터스), 정대세, 산토스 (수원 삼성 블루윙즈))이 세레머니를 하지 않음으로써 희생자 추모에 대한 의미를 표하였다.[194][195] 축구선수 구자철 선수도 검은 완장을 차고 경기에 임했고, 경기전날 세월호에 대한 애도에 동참하기 위해 구단 공식 페이스북을 통해 영상메시지를 보냈다.[196]


4월 23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다저 스타디움에서는 2014 MLB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경기가 열렸는데, 경기에 앞서 다저스 구단은 세월호 침몰 사고 희생자들과 관련된 영상을 전광판에 띄우고 선발 류현진은 물론, 다저스 선수단과 필라델피아 선수들, 모든 관중들까지 자리에서 일어나 모자를 벗고 약 1분간 묵념했다.[197]


4월 27일 구자철(독일 1. 분데스리가 1. FSV 마인츠 05 소속) 선수도 검은 완장을 차고 경기에 임했고, 경기 전날 세월호에 대한 애도에 동참하기 위해 구단 공식 페이스북을 통해 영상메시지를 보냈다. PSV 에인트호번 소속의 박지성 선수도 검은 완장을 차고 경기에 임했다.[198]


영화계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의 뜻을 표하며 각종 행사 취소가 이어졌다. '메이크 유어 무브', '역린', '인간중독', '표적', '리오2', '도희야' 등의 영화가 공식 행사 일정을 취소했다.[199] 전국영화산업 노동조합 위원장 등 영화계 종사자들은 사고 발생 당일인 16일 "조명탄 하나 쏘아 올리는 데에 20~40분씩 걸리는 상황이라면 영화계에서 동원 가능한 영화 조명팀과 조명탑차, 발전차, 크레인, 루나조명기 등을 최대한 동원해 야간 수색작업에 불빛을 밝혀주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현장에서 제대로 조율되지 않아 17일 진도에 장비를 싣고 도착한 관계자들은 하릴없이 기다리다 되돌아왔다.[200]


게임 업계

게임 업계도 각종 행사 및 홍보를 모두 중단하고 탑승자들의 무사 복귀를 기리고 있다. 넥슨은 출시를 앞둔 ‘넥슨 프로야구 마스터 2014’의 미디어데이 행사를 취소하는 한편, 게임 보도자료 배포 역시 중단하기로 했다. 이에 넥슨과 넵튠(개발사)은 ‘이번 진도 해상여객선 침몰사고로 인한 국민적 애도에 동참하고 이른 시일 내 사고 수습이 되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이번 행사를 취소하기로 결정했다’며 "사고로 인한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며, 실종자들의 무사귀환을 기원한다"고 전했다. [201]


종교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는 공식 입장을 발표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의평화위원회는 노동절 메시지에서 '희생자들에게 삼가 애도를 표하며, 유가족들에게 하느님께서 주시는 위로의 은총'을 주시기를 바란다는 입장을 밝혔다.[202]


개신교의 경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돈벌이가 생명에 우선하는 사회를 방기하고 조장'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인정하고, 동시에 대한민국 정부가 정확한 진실을 알리고 실체적 진실을 숨기지 않을 것을 요구했다. 또한 대한민국 행정에 대해 한국 사회가 철저한 감시와 '거룩한 분노'를 일으킬 것을 요청했다.[203] 또한 한국교회연합은 '이번 사고가 인간의 탐욕과 불의에 의해 일어난 사건'이라면서 깊은 애도와 무사생환을 기원했지만, 동시에 '선원 등 90% 이상이 구원파 신자라는 보도를 보고 충격을 금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번 사고에서 '오대양 사건의 악몽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며 정부 당국이 이번 사고와 오대양 사건을 철저히 조사할 것을 요구했다.[204]


기타

바다에서 조난당한 배의 이야기를 다루는 네이버 웹툰 리즌도 사고의 여파로 2주간 휴재한다고 밝혔고,[205] 잡지 맥심 역시 5월호 발행을 보류했다.[206]


타 국가의 반응


2014년 4월 16일, USS 본험 리차드에 탑승해 있는, 31 해병 원정군에 속해 있는 미국 해병. 이 해병들은 세월호 침몰 사건 구조함으로 파견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여객선 침몰에 대해 깊이 애도한다고 밝혔다. 화춘잉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 대변인도 이에 대해 애도를 전하는 한편, 자국 국민 2명 승선사실이 확인되는 만큼 자국 국민의 구조도 당부했다.[207]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는 여객선 침몰에 대한 애도 소식을 전했다.[208] 일본 해상보안청 지원을 타진했지만, 대한민국 해양경찰청은 제의를 거절했다.[209] 애니메이션 포켓몬스터 xy는 24일 방송할 예정이었던 24화 "해저의 성! 수레기와 드레캄!!" 을 사정으로 인해 방송하지 않고, 25화 "소요우 짐전! 피카츄대 티고라스!!" 를 24일에 방송한다. 17일에 방송되었던 예고편에 따르면 24화는 수레기와 드래캄이 지키는 침몰한 여객선을 조사하는 스토리였다. [210] 위성방송 WOWOW는 25일 방영할 예정이었던 영화 타이타닉을 다른 영화로 바꿔 상영하기로 결정했는데, 이 역시 한국에서 발생한 여객선 침몰사고를 고려한 결정이라고 밝혔다.[211]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구조 작업을 돕겠다고 밝혔으며, 사고 해역에 강습상륙함 본험 리처드 함 및 해병을 파견했다.[212] 그러나 본험 리처드 함에서 파견 된 구조 헬기는 한국 해군의 승인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구조에 참여하지 못했다.[213] 한편, 로스앤젤레스 교민들이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는 촛불 집회를 열었으며,[214] 현지에서는 실종자 생환의 기적을 바라는 노란 리본 달기 캠페인 또한 펼쳐지고 있다.[215] 또, 교민들이 세월호 침몰로 희생된 학생들을 기리고 정부의 부실한 대응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광고를 제작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교민들은 뉴욕타임즈에 광고를 싣기 위해 모금 운동을 하고 있으며 일부 완성된 광고 시안을 트위터를 통해 공개했다.[216]


영국 정부는 여객선 침몰에 대해 애도한다고 밝혔다. 윌리엄 헤이그 외무장관은 성명을 통해 애도의 뜻을 전하며, 가능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뜻도 더불어 밝혔다. 일부 런던 시민들은 위로의 뜻으로, 한국대사관과 한국문화원 주변 인도에 꽃을 가져다 놓기도 하였다. [217] 축구팀인 맨체스터 시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218] 첼시는 애도의 뜻을 표했다. 가수 코니 탤벗은 19일 자신의 트위터에 "슬픈 시간을 보내는 한국으로 내일 떠난다"며, "콘서트 수익금을 여객선 사고에 기부할 것"이라고 밝혔다. [219]


프란치스코 교황은 17일, "이번 비극을 당한 모든 이를 위해 하느님의 위로와 평화의 은총을 간절히 바란다"며 위로의 뜻을 전했다.[220]


외신들은 한국이 대형 선박 사고를 숱하게 겪고도 교훈을 얻지 못했다고 일제히 지적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는 경주 리조트 붕괴로 학생들이 100명 넘게 숨지거나 다친 지 몇 달도 안 돼 비극이 벌어졌다고 보도했다. 뉴욕타임스와 로이터 통신은 전쟁 때가 아닌 시기에 발생한 최악의 참사', '20년 간 한국에서 일어난 해상 사고 중 최악'이라고 전했다. 미국 외교 전문지 포린폴리시는 개발도상국에서 흔히 일어나는 여객선 침몰 사고가 21세기 한국에서 벌어졌다고 분석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혼선과 더딘 구조 작업으로 실종자 가족들의 '슬픔이 분노로 변했다'며, 총리가 물세례를 받는 등 불신이 커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블룸버그 L.P.과 CNN, 워싱턴포스트도 정부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학생들이 모두 구조됐다고 발표했다가 철회하는 등 불신을 키웠다고 지적했다. 영국 가디언은 선장과 일부 승무원이 승객 수백 명을 버린 데 대해서도 실종자 가족들이 분노하고 있다고 전했다. [221]


여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구조된 생존자들 대부분은 병원들로 이송되었다. 고대 안산 병원의 한창수 정신과 전문의는 "이송된 환자들이 심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한동안 멍한 상태가 이어졌다"면서 "정신 검진과 스트레스 정도를 파악해 치료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PTSD는 생명을 위협하는 충격을 당하거나 목격한 이후 나타나는 불안함 악몽 등 정서적인 증상이다. 2010년 천안함 사건 생존자 한 명이 PTSD 증세로 의가사 전역하는 등 당시 천안함 생존자 58명 가운데 5명가량이 PTSD를 앓았다. 특히 이번 참사는 생존자 대다수가 고등학생인 만큼 정신적 충격이 더 클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 대한소아청소년정신의학회에 따르면, PTSD의 흔한 증상은 사고 관련 기억이 자주 떠오르고 다시 사고를 겪는 느낌, 악몽, 깜짝 놀라는 반응 등이다. 생존자는 물론 주변 친구, 가족이나 구조인력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사고 현장인 진도 팽목항의 사고본부에서 피해자 가족들이 최근 정홍원 총리를 비롯한 정치권 인사들에게 과격하게 대하는 것도 스트레스의 일부분이라는 지적이다. 사고 후 충격을 조기에 치료하지 않으면 PTSD로 증상이 만성화될 수 있다. 청소년의 경우 인격 발달에도 영향을 받는다. 보건복지부는 사고 당일 5명으로 구성된 심리치료팀을 생존자들이 입원한 안산 구로병원에 보내 심리 지원을 시작했다. 17일에는 여성가족부와 교육부, 소방방재청, 경기도 등과 함께 '중앙재해 심리지원단'을 꾸려 진도 사고 현장에 내려 보냈다. 법률에 따라 재난사고가 발생하면 심리 상담치료를 해야 한다. 하지만 사고 직후인 만큼 유가족들이 상담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고 복지부는 전했다. 복지부 관계자는 "상담치료에 대한 정보를 알리고 안정이 되면 심리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222]


피해자 가족의 건강이상

실종자 가족이 뇌경색으로 쓰러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223]


자살

2014년 4월 18일 오후 4시 5분 경, 수학여행 인솔자로 갔다가 사고를 당하고 구조된 안산 단원고등학교 강민규 교감이 전남 진도체육관 뒤편 야산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되었다. [224] 교감의 지갑에서는 유서가 발견되었다. 유서에는 "200명의 생사를 알 수 없는데 혼자 살기에는 힘이 벅차다. 나에게 모든 책임을 지워 달라. 내가 수학여행을 추진했다"며 시신은 화장한 뒤 사고 해역에 뿌려달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어 "시신을 찾지 못하는 녀석들과 함께 저승에서도 선생을 할까"라는 내용도 적혀있었다.[225] 자살 원인 중 하나로 추정되는 것이 있다. 그는 학생들을 남겨두고 구조된 것에 대해 주위에 “나만 혼자 빠져나온 것 같아 괴롭다”고 호소했으며, 그런 가운데 여객선 침몰로 사망하거나 실종된 단원고 학생 학부모들로부터 “왜 당신만 살아 돌아왔느냐”는 등 강한 질타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226] 강민규 교감은 공주대학교 사범대학을 졸업 후 1987년 중등학교 교사로 임용되어 윤리 과목을 가르쳤다. 2012년 3월 교감으로 승진하였으며, 2014년 3월 1일자로 단원고등학교에 부임하였다.[출처 필요] 21일 오전 11시 40분경, 참고인 신분이었던 세월호 기관사 손모(58)가 자살을 기도했으나 동료와 모텔 직원의 신고로 구조되어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227]


스미싱

세월호 침몰 사고 뉴스를 전하는 내용으로 위장한 스미싱이 발생하였다. 미래창조과학부와 한국인터넷진흥원은 18일 세월호 사고를 사칭한 스미싱 문자가 추가로 발송되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스미싱 문자와 연결된 악성 애플리케이션 유포지를 차단 조치했다고 밝혔다. [228]


각 교육청 조치

경기도교육청은 2014 학년 1학기에 예정된 소재 각 학교의 현장 체험학습을 보류하였다고 밝혔다. [229] 서울특별시교육청은 시내 모든 초, 중고등학교에 현재 계획 중인 수학여행 등 현장 체험학습의 안전상황을 재점검하고 안전에 우려가 있으면 즉각 취소하라고 지시했다. [230] 그리고 18일, 공식 보도 자료로 '수학여행 수련활동 및 청소년 단체 활동 학생 안전사고 예방안내’(2014.4.16.) 공문에 4월 21일 실시 예정인 관내 학교 6개교(초 5, 고 1) 의 제주행 수학여행을 취소 및 보류하였다고 하였다. [231] 대전광역시교육청은 안전이 답보되지 않은 행사는 학교 구성원의 사전협의에 따라 일정을 조정할 것을 권고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5월 중 수학여행이 예정되어 있던 서대전고등학교와 서일여자고등학교 가 일정을 전면 취소했다.[232]


기름 유출

19일 해양경찰청에 따르면 세월호는 벙커C유 120㎘, 경유 50㎘가 적재된 상태로 침몰하였다. 이에 대한 여파로 기름이 유출된 것으로 보인다. 18일 오전까지는 세월호 주변 100m 반경에 엷은 유막이 형성됐지만 하루 만에 훨씬 짙은 기름띠로 변했다.[233]


논란

다양한 주체의 책임 논란

 이 부분의 본문은 세월호 침몰 사고의 책임입니다.

세월호 침몰사고에 대해 청해진해운과 세월호 운행 승무원, 한국해운조합, 한국선급 등 선박 관련 기관들, 그리고 대한민국 행정부가 책임을 소홀히 했다는 비판이 있다.


구조 방법

사고 초기, 적은 수색인원 투입

사고 발생 당일(4월 16일)에 해경과 해군이 투입한 수중 수색 인원은 모두 16명에 불과했던 것으로 드러나 논란이 있다. 뉴스타파는 자신들이 입수한 당시 상황보고서엔 침몰 첫 날 동원된 잠수 요원은 해경 140명과 해군 42명 등 모두 182명으로 나와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가운데 9%만이 실제 수중수색 작업에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300명 넘는 실종자가 선내에 갇혀 있었던 상황에서 소극적 대응을해 인명피해를 키운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있다. [234]


다이빙 벨

다이빙 벨(잠수종)은 수중 작업을 위해 잠수부를 바다 속으로 이동시키는 장치로, 해난 구조 등에 이용된다. [235] 해난구조 및 선박인양 전문가 이종인 알파잠수기술공사 대표는 이 기술을 세월호 침몰 사건에 적용할 것을 제안했다. 이대표는 작업에 영향을 끼치는 요인을 유속과 시계로 크게 나눈 뒤, 시계보다는 유속이 더 문제라고 지적했다. 잠수종은 선체 옆에 붙어 있는 출입구까지 일종의 엘레베이터를 설치하는 것과 같아 이를 통해 다이버가 이동을 하면, 유속이 세도 출입구까지 접근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잠수종의 기본적 아이디어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유래한 것인데, 이대표에 따르면 알파잠수기술공사는 2000년도에 잠수종을 제작을 하여 이 장비를 보유하고 있다. 다이버는 감압을 위해 상당 시간을 물속에서 보내야 하는데, 잠수종은 공기 공간이므로 다이버가 춥지 않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세월호 침몰 사건의 경우엔, 조류를 피할 수 있는 어떤 피난처로 활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알파잠수기술공사 측에 그러한 기술이 있고, 수심 100m까지 작업을 했다는 사실은 다이빙계와 군에도 알려져 있음에도, 잠수종이 세월호 침몰 사고 구조에는 채택되지 않았다고도 주장했다.


이대표는 잠수종 시스템을 이용한 지속적인 작업이 하루에 20시간이 지속 된다면 2, 3일이면 3층·4층·화물칸의 수색이 모두 끝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대표는 지금 구조작업 체계에서는 정부 측에서 책임을 지고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있으므로, 이미 주도가 진행되고 있는 어떤 체계에서는 민간작업자가 끼는 것이 어렵다고 설명했다. 왜냐하면, 이러한 작업에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구조작업에 대한 전제적인 지휘를 자신에게 넘겨야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현재 가능한 것은 단지 인력·장비·안전을 보조하는 것뿐이고, 주수색작업을 위해서 계급이 배제된 실질적인 능력관계가 형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236] [237]


하지만 황대식 한국해양구조협회 본부장은 다이빙벨 투입에 대해 “이론적으로는 (유속에 상관없이 엘리베이터 형식으로 내려갈 수 있어 20시간 동안 작업이 가능하다는 게) 그럴 수 있지만 이쪽의 조류가 워낙 세고 탁도가 높기 때문에 부피가 큰 다이빙벨을 선체 내부에 넣지는 못 한다”고 말했다. 이어서 “다이버에 의한 수색 구조 방법을 사용을 하면서 그 다이버들이 안전하게 오랜 시간 동안 수색 구조를 할 수 있는 방법들을 고려할 때 그런 것(다이빙벨 등)들도 후차적으로 필요하지만 그걸 설치하기 위해서 우리가 수색 구조 활동을 놓칠 수가 없다”는 이견을 보여 논란이 있다. [238]


이 대표는 4월 21일 새벽, 자비를 털어 다이빙 벨, 작업용 CCTV 등 수십톤의 장비와 인력을 바지선에 싣고 인천항에서 팽목항으로 이동했다. 일부 다이빙벨 투입을 원하는 실종자 가족들이 해경 측에 다이빙벨 투입을 건의했고 이 결과 10여 시간 만에 다이빙벨이 사고현장으로 출발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이빙벨이 기존 작업에 방해가 되고 이미 바지선이 설치돼 있어 안전 사고 우려가 있다는 등의 이유로 구조당국의 허가가 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239] 이종진 대표는 결국 다이빙 벨 등의 장비를 철수시키며 "생존자 찾아 에어포켓까지 들어가고 싶었다. 그게 구조지 지금 이게 구조인가"라고 하소연을 했다고 전해진다.[240]


그러나, 안전 문제로 이종인 알파잠수기술 대표가 제안한 잠수장비 '다이빙 벨'을 불허한 해경이 대학에서 다이빙 벨을 비공개로 현장에 투입되어 논란이 있다. 고발뉴스는 “23일 새벽 2시30분 강릉 모 대학으로부터 위급한 상황이 있다며 다이빙벨을 빌렸다더라. 언론 몰래 비밀리에 아침 9시에 현장으로 보내는 과정을 포착했다”라고 했다. 이어 “강릉의 모 대학과 통화해 구조 당국이 다이빙벨을 빌린 사실을 확인했다. 해당 대학의 한 교수는 돈을 받은 것은 아니고, 위급하다며 협조 요청이 들어와 빌려줬다”고 말했다.[241] 해경측은 "(다이빙 벨을) 실제 구조작업에는 사용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보였다.[242]


이에 대해 언딘측의 공식발표에는 언딘에서 단독으로 가지고 온 것이며 이는 현장에 당장 투입하기에 어려운 조건인데 이종인의 다이빙벨이 여론화되자 자신들도 다이빙벨 장비를 가지고 있다라는 목적으로 빌렸다고 밝혔다.[243]


세월호 실종자 가족들은 24일 오후 팽목항을 찾은 이주영 해양수산부 장관, 김석균 해양경찰청장에게 이종인 대표의 작업 참여를 강력히 요구해 다이빙벨 투입을 약속 받았고,[244] 이에 따라 이 대표는 25일 오전 11시 40분쯤 팽목항에서 출항했지만 앵커(일종의 닻)를 설치하지 못했고 거센 조류에도 밀려 다이빙벨 투입에 실패한 뒤 26일 낮 12시쯤 팽목항으로 귀항했다.[245] 그 후, 30일에 재투입되어 2시 55분께 버팀줄 선체 이음매 조이기에 성공했으나, 버팀줄에서 선내 진입구까지 단거리 유도선 설치에 실패했다. 높은 파고로 알파 바지선의 가로·세로 움직임이 컸기 때문이라고 한다.[130] 오후 3시 45분에 다이빙벨을 선미 쪽에 투입했지만 투입 과정에서 잠수부 1명의 공기호스가 다이빙벨 운용 와이어에 씹혀 터지는 바람에 다이빙벨은 투입된지 28분만에 밖으로 건져졌다.[131] 다음 날인 5월 1일 새벽, 사고 해역에 다이빙벨을 투입한 뒤 잠수부 두 명이 세월호 선내에 진입해 각각 20여 분씩 수색작업을 벌였지만 실종자들을 찾지는 못했다. 오전 11시쯤 사고 해역에서 바지선과 다이빙벨을 철수시켰으며, 이 대표는 실종자 가족들에게 죄송하다고 말했다.[133] 하지만 세월호 침몰 해역에 투입돼 다이빙벨 잠수까지 성공적으로 마쳤던 이종인 알파잠수기술공사 대표가 1시간여 만에 철수한 것과 관련해 의문이 가시지 않고 있다.[246]


다이빙벨이 별다른 성과 없이 철수하면서 이에 대한 피해 가족들의 분노가 극에 달하고 있는 실정이다. 투입 여부 논란 탓에 구조에 시간만 빼앗겼다는 것이다.[247]


민간 잠수사 배제 논란

한 민간 다이버 관계자는 23일 오전 "해경이 정조시간에 민간 잠수사를 통제하거나 별다른 설명도 없이 수색작업에 제외돼 대기만 하다 돌아왔다"며 "계약된 민간 구난업체 잠수사는 수색을 하는데 이건 불합리하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물살이 약해져 수색이 용이한 정조시간에 주로 해경과 해군이 작업을 하면서 나머지 시간에 민간 측에 들어가라고 하지만 물살이 세서 힘들다"고 주장했다. 22일 오후에는 민간 잠수사 100여명이 철수하고, 이후에는 20∼30명의 잠수사만 팽목항에 남아있게 되었다. 이에 대해 해경 측은 민간 잠수사의 작업 배제가 오해라고 주장했다. 해경 관계자는 "UDT, SSU를 비롯해 베테랑 특수대원 수백명이 대기하고 있고 물살이 약해지는 소조기를 맞아 집중적으로 수색을 하려는 것일 뿐"이라며 "민간 잠수사들은 절차와 방법, 시간대를 고려해 투입할 예정"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갈등은 수색초기부터 잠재돼왔다는 것이라고 민간 다이버들은 주장했다. 현장의 지휘통제는 해경이 맡았지만 해경, 해군, 소방방재청, 민간 잠수사 등 민·관·군 잠수사들에 대한 효율적인 지휘체계가 없어 지시와 이행이 겉돌고 혼선이 빚어지는 현상도 있다고 하여 논란이 있다.[248]


최첨단 수상구조함 통영함

최첨단 수상구조함인 통영함을 보유하고도 투입할 수 없어 논란이 있다. 통영함은 천안함 사건 이후 겪었던 어려움을 교훈으로 삼아 대한민국 정부가 자체 기술로 만든 3,500t급 최첨단 수상구조함이다. 2012년 9월 4일에 진수된 통영함은 실링 로보틱스 HD ROV로 최대 수중 3,000m까지 탐사할 수 있고 해난구조대(SSU)가 수심 90m에서 구조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체계도 갖추었다. 통영함은 세월호 사고처럼 선체 진입이 어렵고 6,800t의 무게 때문에 크레인 인양작업에도 난항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꼭 필요하다. 그런데 국방부 김민석 대변인은 통영함 일부 장비, 음파탐지장비·수중로봇장비가 제 성능을 낼 수 있는지 해군이 아직 확인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밝혔다. 이 때문에 함정을 진수한 지 1년 7개월이 지나도록 해군이 장비 점검도 하지 못했다는 점에 대하여 논란이 있다. [249] 논란 끝에, 4월 20일 밤에 조종사인 미국 해군 2명과 실링 로보틱스 HD ROV 2대가 현장에 투입되었다. [250]


대한민국 정부

박근혜 대통령 발언에 대한 외신들의 비판

외신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비서관회의(4월 21일)에서 “선장과 일부 승무원들의 행위는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고 용납될 수 없는 살인과도 같은 행태"라고 말한 점에 주목했다. 영국 가디언은 ‘한국의 세월호 참사는 진정 끔찍하지만, 살인이 아니다’(The South Korea ferry disaster is truly awful, but it is not murder)는 기사에서 “어린 아이들이 희생된 비극은 극심한 감정을 유발하지만 세월호 선원들에 대해 너무 쉽게 ‘살인자’라는 꼬리표가 붙는다”며 “번역의 복잡함과 문화적 차이를 인정한다고 해도 ‘살인자’란 단어는 눈에 띈다”고 했다. 월스트리트 저널 역시 '박 대통령, 세월호 선장에 '살인과도 같다'…옳았나?’(Was Park Right to Condemn Ferry Crew?)라는 기사에서 “박 대통령의 발언은 사고 초기 (구조자 수 집계 등) 오보와 느리고 분별력 없는 대응으로 비판받은 정부의 재해 대처에 대한 주의를 돌리기 위한 시도라는 비판이 나온다”고 주장해 논란이 있다.[251]


서남수 교육부 장관

서남수 교육부 장관은 사고 당일인 4월 16일 오후 4시 경 진도 실내체육관을 찾았다. 그는 구조된 학생들이 바닥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누군가 마련해 준 팔걸이 의자에 앉아 컵라면 등을 먹으며, 자신을 수행하던 이에게 함께 먹자고 손짓을 하기도 했다.[252] 서 장관이 컵라면을 먹은 곳은 세월호 구조자들이 응급치료를 하던 테이블임이 드러나 논란은 더욱 커졌다.[253] 또, 4월 18일 오후 6시께 안산의 한 장례식장에 마련된 단원고등학교 학생 이모 군의 빈소에 서 장관이 수행원 3~4명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이 가운데 한 수행원이 서 장관보다 몇 걸음 먼저 빈소 앞에 다가가 유족에게 입구 쪽을 가리키며 "교육부장관님 오십니다"라고 귓속말을 건넸다. 유족은 곧바로 수행원을 향해 "어쩌란 말이냐. 장관 왔다고 유족들에게 뭘 어떻게 하라는 뜻이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윽고 도착한 서 장관이 조문하는 동안에도 유족은 수행원을 몰아붙였고, 조문을 마치고 나온 서 장관은 "죄송합니다. 제가 대신 사과하겠습니다"라고 짧게 말하고 바로 장례식장을 빠져나갔다.[254]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의 해명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이날 팽목항 사고상황실에서 기념 촬영을 시도해 물의를 일으킨) 안전행정부(안행부) 공무원은 사표를 수리했는데 라면을 먹은 교육부 장관은 어떻게 되느냐'라는 기자의 질문을 받고 "국민 정서상 모든 것을 조심했어야 하는 건데 그렇게 됐다"고 언급하며, 질문과 대답 간의 논점이 상이해 논란이 있다.[255] 또, 민 대변인은 “안보실의 역할은 통일, 안보, 정보, 국방의 컨트롤 타워다. 자연재해 같은 거 났을 때 컨트롤 타워가 아니다”라며, “국가 안보와 관련해서 봐야할 것이 많은 곳이다. 재난에 대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비판은) 적절치 않다”고 전했다. 하지만 청와대는 세월호 침몰의 심각성이 확인되지 않았던 사고 초기, 사고를 직접 챙기며 충분히 사고에 대응할 수 있다는 듯한 모습을 여러 차례 보여줘 논란이 있다.[256]


송영철 안전행정부 국장의 기념사진 논란

송영철 안행부 국장은 20일 오후 6시경, 진도 여객선 세월호 사고 현장을 방문했다. 그러나 상황 본부의 세월호 침몰 사망자 명단 앞에서 공무원들과 기념사진 촬영을 하려하였다. 이에 현장에 있던 실종자 가족들에게 거센 항의를 받았다. 이와 같은 논란에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20일 트위터를 통해, “사망자 명단 앞 기념촬영 안행부 국장 직위 박탈”이라는 기사를 링크하며, “그 앞에서 인증 샷 찍을 기분이 나냐. 이 정도면 일베 수준”이라고 언급했다. 또한 “해도 해도 너무 하네. 어쩌다 나라가 이 지경이 됐을까”라고도 언급했다. 현재 안전행정부 국장은 직위 해제 된 상태로, 안전행정부는 “앞으로 징계위 회부 등 절차가 남아 있다. 향후 관련 절차에 따라 엄히 문책할 방침이다”라고 전했다. [257]


정보당국의 통제 의혹

세월호 참사로 정부의 재난관리 대응에 대한 비판(미흡한 초동 대처, 부처간 혼선, 구조활동)여론이 있는 상황에서, 이번 사고 구조에서의 골든타임 낭비로 인한 인적 피해와 주먹구구식 인력 운용, 장비의 후진성 등 민감한 문제들이 대학 교수들의 비판이 이어졌었다. 그러나 사고 발생 6일째, 21일부터는 이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언급을 하지 않고있다. 정부의 재난 대응에 대한 문제제기는 관련 전문가들이 큰 몫을 하였다. 노컷뉴스는 기자가 목포해양대에 전화를 했을때, 조교가 교수들의 입장을 대신 전했다고 주장했다. 조교가 "선생님들이 인터뷰를 피하고 계시는 입장이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258]


구급차로 출퇴근하는 보건복지부 공무원들

세월호 사건 당시,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구급차량을 이용한 공무원들에게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팽목항은 진입도로가 좁아 원활한 환자수송을 위해 구급차량 말고는 통행이 제한된다. 그런데 걸어야하는 거리가 불과 1km 정도에 불과했다. 보건복지부 공무원들이 구급 차량을 멋대로 타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은 병원이나 보건소 구급차량을 쓸 일이 거의 없어 대기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논란이 있다.[259][260]


해경 관계자의 실언

목포해양경찰서의 한 간부는 세월호 침몰 사고 다음 날인 17일 ‘세월호 사고에 대한 해경의 초기 대응이 미진하지 않았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해경이 못 한 게 뭐가 있느냐. 더 이상 뭘 어떻게 하란 말이냐. 80명 구했으면 대단한 것 아니냐”며 항의해 논란이 있다. 발언이 알려진 후 해양경찰청은 그를 직위 해제했다.[261]


해군의 방송 연출

4월 22일 오후 6시 50분쯤 세월호 침몰 사고 현장에 정박한 대한민국 해군 청해진함 갑판. 해군 해난구조대(SSU) 소속의 잠수사 A상사가 흠뻑 젖은 잠수복 차림으로 방송사 카메라에 둘러싸여 실종자 수색 상황을 설명했다. TV에서 이 인터뷰 장면을 볼 시청자들은 A상사가 막 수색 작업을 마치고 선상에 오른 것으로 알 것이다. 그러나 그의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이 실은 바닷물이 아니라 맹물이었다. 그는 이 날 오전 수색 작업을 마치고 대기하던 중 인터뷰 10분 전에 불려왔다. 해군 관계자들은 '현장감 있는 영상이 필요하다'는 방송사 몇 곳의 요청을 받자, A상사에게 드라이수트(방수 잠수복)로 갈아 입으라고 지시했다. 그래도 현장감이 덜하다고 판단했는지, 해군 관계자는 급기야 장병을 시켜 갑판에 설치된 수도 장치로 A상사의 전신에 물을 뿌려 적시기 시작했다. 해군은 '말 맞추기'도 했다. A상사가 바다 속 상황에 대해 "오늘은 시정이 50~60㎝로 이전보다 잘 보인다"고 말하자, 해군 관계자가 끼어들었다. "그렇게 말하면 시계가 좋아 보이잖아. 30~40㎝로 가자." [262]


정치권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

세월호 참사와 관련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이 청와대 출입 기자들에게 "한 번 도와주소"라며 정부 비판 보도를 자제해달라는 내용의 문자를 보낸 것으로 확인됐다. 박근혜 정부에 대한 비판이 거세질 조짐이 보이자 홍보수석이 이 같은 문자를 보낸 것으로 보인다. 실종자 수색이 이어지고 있고 사고 원인 등이 명확히 규명되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에 대한 비판은 불필요하다는 식의 주장이어서 논란이 불가피하다.[263]


유정복 전 안전행정부 장관

2월 14일 청와대 업무보고에서, 유정복 전 안전행정부 장관은 '이전 정권에서는 해마다 10명 이상 사망하는 대형사고가 발생했지만, 지난해에는 50년 만에 그런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고 한 당국자는 전했는데, 불과 사흘 만에 경주 마우나 오션 리조트가 붕괴되는 사고로 신입생 환영회에 참석한 부산외대 학생 10명이 숨지고 100여명이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리고 연이어 4월에는 세월호가 침몰하면서 유 전 장관의 발언이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264]


국회의원 한기호(새누리당)

세월호 침몰 사고에 대한 정부의 대응에 대한 비난여론이 거세지는 상황에서, 새누리당 한기호(강원 철원·화천·양구·인제군)가 20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에“드디어 북한에서 선동의 입을 열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북괴의 지령에 놀아나는 좌파 단체와 좌파 사이버 테러리스트들이 정부 전복 작전을 전개할 것입니다. 국가 안보 조직은 근원부터 발본 색출해서 제거하고, 민간 안보 그룹은 단호히 대응해 나가야합니다”라는 글을 올려 논란이 있다. 앞서 조선중앙통신은 지난 18일 세월호 침몰 사건을 보도하면서 “남한의 한 방송사가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는 실종자 가족들이 품었을 슬픔과 분노가 얼마나 깊은지 정부 당국은 깊이 새겨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기 때문이다. 이에 백찬홍 씨알재단 운영위원은 SNS 상에서 “세월호에 대한 대응 체계 붕괴로 박근혜 정부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자 새누리당 한기호 의원이 종북 프레임을 들고 나왔군요. 자식을 잃고 비탄에 빠진 학부모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있네요”라고 지적했으며, 한 누리꾼도 SNS 상에서“구조를 제대로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정부를 비판하는 건 사회 분열을 노리는 종북이거나 그러한 북한의 지령에 놀아나는 행위라는 게 새누리 국회의원(한기호)부터 온갖 수구보수들의 주장이로군. 대단한 병자들”이라고 꼬집었다. 파문이 확산되자 한 의원의 글은 페이스북에서 삭제됐지만, SNS 상에서는 이 글이 갈무리돼 전파되고 있다. 그러자 그는 페이스북에 “북한이 이번 참사 수습을 무능한 정부 탓이라고 비난한 것이 사실 아닌가요? 여기에 놀아나서는 안 된다는데 문제가 있나요?”라는 글로 반박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논란이 끊이지 않자 페이스북을 모두 비공개로 전환했다. [265]


가짜 실종자 대표(새정치민주연합)

실종자 가족 대표를 맡았던 남성이 안산 지역구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로 6·4 지방선거에 나가려던 사람이란 것이 밝혀져 논란이 있다. 세월호 침몰 사고 후 자신을 아동센터를 운영하는 목사라고 소개한 송정근은 실종자 가족 대표로 활동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진도 실내체육관을 방문했을 때에는 나란히 단상에 서서 사회를 보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호 탑승자 가운데 송정근씨의 가족은 없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실종자 가족들은 격앙된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 송정근은 “처음부터 정치적 이유는 없었다”고 해명했다.[266] 그러나 송 씨가 실종자 가족이나 유족이 아님은 현지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이미 알려진 일이고, 단원고를 포함한 안산 청소년들에 대한 지원 활동을 해온 송 씨의 이력에 비춰볼 때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라는 일부의 반론도 있다. 송 씨는 목회자(목사)로서 가출청소년 상담 등을 해왔으며, 대통령과의 간담회 후 이 문제가 언론에 불거지기 전인 지난 18일 도의원 예비후보직을 사퇴했다. 인터넷 등에서는 새누리당 국회의원 등 여당 정치인들이 세월호 참사 와중 일으킨 논란을 덮으려는 '물 타기'라는 의심까지 나오기도 했다. 송 씨는 <프레시안>과의 통화에서 자신이 이날 오후 탈당계를 제출했다고 밝히며 자신의 억울함을 적극 변호했다. 실종자 가족 대표를 맡게 된 경위에 대해 그는 "(진도에) 도착했을 때 여러 교회 목사님들과 학부모들이 있었는데 '누군가 대표를 맡아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고, 그분들이 '일단 맡아달라'고 요청해서 맡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267]


이윤석 전남도당위원장(새정치민주연합)

사고 당일날 늦은 저녁, 이윤석 의원은 해경경비정을 타고 사고 해역을 다녀왔다가 '특혜' 논란으로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애를 태우고 있는 실종자 가족들도 현장에 가고 싶어도 배편이 없어 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특권을 누렸다는 것이다. 논란이 커지자 이윤석 의원과 새정치민주연합은 공식 브리핑 등을 통해 "해경은 안전의 이유 때문에 밤중에는 학부모들을 원하는 대로 다 태울 수 없다는 방침을 갖고 2분만 태운 것으로 확인됐다"며 "어떤 국회의원이 그 밤중에 비 맞으면서 풍랑을 헤치고 특권을 가지고 5시간에 걸쳐 현장을 다녀오겠나, 특혜라는 것은 억울하다"고 밝혔다.[252]


국회의원 권은희(새누리당)

일부 인터넷 게시판에 "선동꾼 아줌마"등의 이름으로, 일부 유가족들을 선동꾼으로 몰아가는 글이 개재 되었다. [268] 새누리당 권은희 의원은 밀양송전탑 기자회견에 참가한 관계자가, 실종자 가족인척 하면서 선동하고 있다는 글을 지인의 글을 보고 퍼왔다며 "세월호 실종자 가족 행세를 하며 정부를 욕하며 공무원들 빰 때리고 악을 쓰고 욕을 하며 선동하던 이들" "학부모 요청으로 실종자 명찰 이름표를 착용하기로 하자 잠적해버린 이들. 누구일까요? 뭘 노리고 이딴 짓을 하는 걸까요? 현자에 혼란과 불신, 극한 대립을 일으키는 전문 선동꾼은 누굴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인지?" "유가족들에게 명찰 나눠주려고 하자 그거 못하게 막으려고 유가족인척 하면서 선동하는 여자의 동영상입니다. 그런데 위의 동영상의 여자가 밀양송전탑 반대 시위에도 똑같이 있네요" "지인의 글을 보고 퍼왔습니다. 온 나라가 슬픔에 빠져있는 이 와중에도 이를 이용하는 저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온라인에 도는 터무니없는 비방과 악의적인 루머도 잘 판단해야겠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성적인 대응이 필요한 때입니다" 라는 내용의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또한 항의하는 실종자 가족의 사진, 밀양송전탑 기자회견 사진, 동영상을 올리며 모두가 동일인물인 것처럼 적었다. 댓글에는 "(선동꾼은)자수하라"는 식의 댓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사진은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덧씌운 사진이며, 영상 속의 인물들은 안산 단원고 2학년 1반 조은화 학생의 가족이 맞다고 밝혀졌다. 원본사진의 당사자인 권씨는 "세월호 침몰 이후 진도에 전혀 간 적 없고, 육안으로 봐도 그 사진이 조작됐다는 걸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런데도 권 의원이 국회의원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 무책임하게 글을 올려 나를 범죄인으로 낙인해버렸다" 면서 21일 대구성서경찰서에 진정서를 냈다. 또한 권씨는 이러한 내용을 퍼뜨린 블로거들과, 일베저장소(일간베스트)에 글을 올린 17~18명에 대한 처벌도 경찰에 요청했다. [269] [270] 인터넷 게시판 베스티즈에는 "<도움 요청글 >여러분 선동꾼 누명좀 벗겨주세요" 이라는 제목으로, "위 영상속에 이랜드 티셔츠 입으신 분은 저의 작은어머니이시며 저희 삼촌내외분 막내딸 은화.. 단원고 2-1반 조은화 입니다" "아시는분 아시겠지만 오늘 새벽에 베티에서 저희 작은엄마가 나오신 저 영상이 세월호 선동꾼 이라는 제목으로 오해를 받고 들어서는 안될 욕을 듣고 있는 상황이 발견되어 제가 급히 삭제요청해서 글쓴이는 삭제 후 사과도 없이 자췰 감췄다" "포털에 선동꾼이라고 검색하면 그 동영상이 여러 블로그나 커뮤니티등에 선동꾼이라 유포되어 심각한 명예훼손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현재... 제가 이런 일이 처음이고.. 어찌할 바를 몰라 이게 제 일이라면 당장 싸그리 고소라도 하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고.... 처지도 아니니.. 그야말로 미치고 팔딱 뛸 노릇입니다" "여러분 제발 저희 작은엄마는 선동꾼이 아니라 억울하게 자식잃은.. 정부의 무능력한 대처로 하나부터 열까지 이해가 안가는 억울한 상황에 분노로 가득찬 고통받고 있는 부모라는거 .. 널리 알려주세요.. 이런글 올리게 되어 죄송하지만 제가 글남길수 있는 큰 사이트는 베티뿐 이라서 남기오니.. 도와주세요" "저 영상속 상황엔 제가 현장에 없어 정확히 모르지만 일단 명찰에 대해선 목적은 부모님들 DNA 검사때문에 만들어진걸로 아는데요.. 실제로 저곳엔 엄청난 수의 사복경찰, 분위기를 조장하는 전문 프락치 들이 상당수 존재 합니다" "명찰은 오직 실제 부모만 소지가능해서 분실하지 않기 위해 조심하고 있었구요.. 그리고 저 옆에 아주머니도 영상으로 제가 확신하긴 어렵지만 체육관내 저희 자리앞에 계시던 가족분중 한분 인듯 합니다" 라는 내용의 글이 올라왔다. [271] [272] 조은화 학생은 구조되지 못한것이 사실인 것으로 밝혀졌다. [273]


전 국회의원 송영선

송영선 전 의원은 "이번 기회가 너무나 큰 불행이지만 우리를 재정비할 수 있는, 국민의식부터 재정비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꼭 불행인 것만은 아니다"며 "좋은 공부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발언해 질타를 받고 있다. 그러자 송영선 전 의원은 4월 23일 채널 A와의 전화통화에서 "제 말에 의해 상처를 받으신 분, 털끝만큼이라도 상처받으신 분이 계시다면, 용서하십시오. 너무 죄송합니다"라고 공식 사과했다.[274]


국회의원 정몽준의 아들

새누리당 정몽준 국회의원의 막내아들이 세월호 실종자 가족을 비하하는 글을 올려 논란이 일고 있다. 그는 사고 이틀 후인 4월 18일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대통령에 소리 지르고 욕하고 국무총리에 물세례. 국민 정서 자체가 굉장히 미개"라는 글을 올렸다. 이는 지난 17일 일부 실종자 가족이 진도 실내체육관을 방문한 정홍원 국무총리에게 생수병을 던진 것에 대한 글이다. 이에 대해 비난여론이 일자 정몽준 의원은 21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사죄드린다"라고 말했다.[275]


사죄 드립니다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 여러분, 그리고 국민 여러분께 머리 숙여 깊이 사죄드립니다. 제 막내아들의 철없는 짓에 아버지로서 죄송하기 그지없습니다. 저희 아이도 반성하고 근신하고 있지만 이 모든 것이 아이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저의 불찰입니다.

이번 일로 마음의 상처를 입으신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 그리고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2014. 4. 21.

정 몽 준 올림[276]

진중권 교수는 트위터를 통해, 이 논란에 참여했다. 그는 "그가(정몽준 의원의 아들이)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또 사람들이 울부짖는 세계가 이상(미개)하게 느껴졌을 것이라며, 이를 몇 천 억을 가진 이들의 삶이 많은 이들에게 초현실이자, 비현실로 느껴지는 것과 같다고 비교했다. 그는 "자식을 잃은 부모가 절망과 고통에 몸부림치고 그것을 지켜보는 이들이 함께 슬퍼하고 분노하는 게 미개한 정서라면 이 사회에서 문명인은 오직 하나 사이코패스 뿐"라고도 결론 내렸다. [277]


보수논객 지만원

인터넷 사이트 시스템클럽을 운영하는 대한민국의 보수논객 지만원은 세월호 침몰사고에 대한 시민들의 비판을 "시체 장사"로 지칭하며 박근혜 대통령에게 "제 2의 5·18 폭동을 대비하라"고 말해 파문이 일고 있다. 그는 안산과 서울을 연결하는 수도권에서 국가를 전복할 목적으로 획책할 ‘제 2의 5·18 반란’에 지금부터 빨리 손을 써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지금 남한의 빨갱이들은 큰 대목을 잡아놓고 있다”며 “많은 국민들이 박근혜의 능력을 불신하고 있으며 점점 식상해 하고 있다. 저들은 온갖 유언비어와 선동으로 이런 물결을 더욱 거세게 증폭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제2의 5·18 폭동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는 확신 하에 대통령은 단단히 대비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는는 이어 "무능한 박근혜 퇴진과 아울러 국가를 전복하기 위한 봉기가 바로 북한의 코앞에서 벌어질 모양이다. 매우 위험한 도박인 것이다. ‘시체 장사’에 한두 번 당해봤는가? 세월호 참사는 이를 위한 거대한 불쏘시개다"라고 주장했다.[278] 그는 전날인 21일에도 같은 곳에 글을 올려 세월호 침몰 사고를 “기획된 음모”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세월호 참사 계기, 대통령은 핸들 틀어야”라는 글[279]에서 “겉으로는 노인 선장과 20대의 여성 등의 미숙함으로부터 발생한 우연한 사고처럼 보이지만 속 내용을 들여다보면 정밀하게 기획된 음모처럼 보인다”며 “이상 징후가 발생한 지 불과 20분 만에 세월호 승무원 29명 가운데 23명이 구조됐다…어찌 그 많은 승무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유니폼을 벗어 던지고 부리지(가장 잘 보이고 안전한 곳)로 나왔을까? 사고를 미리 예측한 듯한 태도로 해석된다”고 음모론을 제기했다. 이어 “이 참사는 선거철을 맞은 집권당에 치명적인 타격을 이미 주었고, 지지도가 급상승하는 박근혜에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 머지않아 빨갱이들이 5.18 광주 폭동을 방불케 하는 대규모 폭동을 획책할 모양”이라고 주장해 논란이다.[280]


일베저장소

일베저장소(일간베스트)의 일부 누리꾼들이 세월호 실종자 및 희생자 가족들을 '유족충(蟲)'이라고 부르며, 적나라하게 모욕해 논란이 있다. 이에 경찰청은 해당 게시글 작성자에 대한 수사를 시작했다고 19일 밝혔다. 전라남도 진도 앞바다에서 세월호가 침몰한 16일 이후, 일베저장소 게시판에는 피해자 가족을 조롱하는 글이 잇따라 올라왔다. 사고 지역이 전라남도이고 세월호 선장이 전라도 출신이라면서, 노골적인 지역차별 정서를 부추기는 내용이 많다. 또 피해자 가족을 '(진도) 유족충'이라고 조롱하며, 비속어를 섞어 비아냥대는 글도 상당수다. 수학여행 도중 희생된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의 시신을 조롱거리로 삼는 글도 있다. 경찰은 이들 게시글 가운데 일부를 삭제하고 IP를 확보해서 작성자를 추적 중이다. 경찰 관계자는 "근거 없는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행위자들에 대해서는 끝까지 추적해 검거할 것"이라고 밝혔다. [281] 이 방침에 따라, 피해 여학생과 여교사를 대상으로 성적 모욕성 게시물을 올린 A(28)가 경찰에 검거되었다. A는 경찰에서 자신의 행위의 이유에 대해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주목받기 위해 게시물을 작성했다"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282]


그런데, 이 와중에 "일베저장소 일동"이란 이름의 근조화환을 한 일베회원이 보내기도 하여 누리꾼들 사이에 진정성 논란이 있다. [283]


또한 이들은 노란 리본을 "일베"의 모음인 ㅇㅂ 모양으로 바꾸거나 전 대통령을 비난하는 등의 사진으로 바꾸어 올려 논란이 되고 있다. [284]


언론

JTBC 기자가 구조된 학생과 인터뷰 도중 학우의 사망을 알리는 부적절한 질문을 하여 논란이 되었으나, JTBC 측에서 해당 기자를 대신해, 9시 뉴스 앵커 손석희가 깊이 사죄드린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285] 또한 SBS 기자가 뉴스를 보도하던 중 기자들의 웃는 모습이 등장했던 방송사고가 논란이 되고 있다. 이에 SBS는 20일 오후 뉴스 공식 트위터를 통해 "세월호 승선자 가족들과 시청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라고 밝혔다. [286][287]


MBN 뉴스특보 프로그램(4월 18일 오전 6시)에서는 민간 잠수사라고 자칭하는 여성이 인터뷰를 통해 정부가 민간 잠수사들의 구조작업을 차단하고 있으며, 바다 속에서 생존자의 목소리를 들은 사례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해양경찰청은 민간 잠수사들의 구조작업을 차단한 사실이 없고 이날도 70여명이 동참하고 있었다고 해명하였고, 한국구조연합회 회장인 배우 정동남은 "해경이 민간잠수부 활동을 막는다는 허무맹랑한 소문들을 퍼뜨리는데 그것은 유가족을 두 번 죽이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288] 스포츠월드 김용호 기자가 자신의 트위터에 이 여성이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글을 올린 것이 알려지고,[289] 이 여성의 인터뷰 내용이 사실 왜곡 논란과 구조 현장에서의 혼선을 일으키자 MBN 보도국장 이동원은 직접 방송에 출연하여 공식 사과하였다.[290], 전남지방경찰청은 4월 19일 잠적한 해당 여성에 대해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체포영장을 신청하였고 21일 그녀를 검거하였다.[291][292][293][294]


문화일보와 내일신문은 침몰사고 초기에 '477명 탄 여객선 침몰... 대형 참사 날 뻔했다'란 기사제목으로 사고 초기에 오보하여 관련 학부모들과 학교관계자 및 국민들에게 혼란을 주었고 초기 대응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295]


그 밖에 대한민국 언론의 속보 경쟁 폐단과 실종자 가족 취재의 보도 윤리 문제에도 논란이 있으며, 세월호 침몰 사고를 계기로 한국 저널리즘을 성찰해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296] 사고 현장에서 언론은 실종자 가족의 불신의 대상이 되었도 했다. 불신은 심지어 기자들에 대한 폭력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몇몇 기자들은 수첩을 뺏기고 멱살을 잡혔다. 하지만 실종자 가족들은 세월호 침몰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온 외신에 대해서 비교적으로 호의적으로 대했다.[297][298] 또, 사고 초기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에게 대한 과도한 취재 또한 논란이 되었고, 이는 4월 24일 단원고 3학년 학생이 기자들에게 쓴 글이 발표되면서 이에 대한 논란과 반성 또한 급부상하였다.[299]


기타 논란

사고 발생 시간

실제 배에 문제가 생긴 시점과는 별개로 나중에 침몰과 대형 참사로 이어지는 사고가 외부에 인지된 시점에 대하여는 여러 논란이 있다. 공식적으로 세월호 침몰 사고는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52분 32초 (KST), 전남소방본부 119상황실에 최초로 신고 전화가 걸려옴으로써 알려졌다. 하지만 세월호가 최초 신고 40여 분전 이미 해경과 연락 두절 상태였다는 정황을 담은 교육청의 내부 일지가 발견되어 오전 8시 10분에 이미 사고를 교육청이 인지하고 있었다는 의혹이 있다.[300] 또 그보다 앞서 KBS의 아침 정규 방송인 '굿모닝 대한민국 생방송' 중, 7시 20분에 자막으로 세월호 침몰 관련 자막이 나왔었다는 이야기가 SNS를 통해 알려졌으며, 논란이 일자 KBS는 이 프로그램의 녹화 재방송 분을 편집하여 해당 자막을 흐릿하게 지웠다.[301] 하지만 KBS는 4월 16일 8시 59분에 자사의 트위터 계정으로 오전 7시 20분부터 구조작업이 시작되었다는 트윗을 발송함으로써, 적어도 7시 20분이전에 사고가 발생했다는 것을 시사하였다.[302] 또한 YTN의 보도 영상에는 사고 일시가 4월 16일 08:00 경으로 기록된 사고 개요 보고서가 안행부에 보고된 화면이 포함되어 있다.[303]


사고의 공식 명칭

이 사고를 처음에는 '진도앞바다 여객선 침몰 사고'로 부르다가 '세월호 침몰 사고'로 바꾸었으나, 사고의 책임 소재를 명확하게 하기 위하여 선사의 이름을 포함하여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로 불러야 한다는 논란이 있다.


루머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는 침몰된 배 안에 생존자가 있는 것을 확인했다는 내용이 퍼졌다. 그러나, 세월호 침몰 사고와 관련해 세월호 생존자가 보낸 것으로 추정된 메시지가 허위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서 논란이 있다.[304][305] 경찰청 사이버테러 대응센터는 17일 "실종자 전체의 휴대전화 번호를 확보해 침몰 사고 이후인 16일 정오부터 이날 오전 10시까지 이용 내역을 확인한 결과 모두 사용된 적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경찰은 최초 유포자를 추적해 사법처리할 것이라 밝혔다.[306][307] 광주지검 목포지청은 23일 세월호 침몰사고 구조과정에서 거짓 인터뷰를 한 혐의(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로 홍아무개를 구속했다. 그녀는 18일, MBN 뉴스특보에 출연해 자신을 민간잠수부라고 소개하며 "민간 잠수부와 관계자의 협조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지원하겠다는 장비와 인력 등이 전혀 오지 않았고 현장 관계자가 민간잠수부들의 투입을 막는가 하면 '대충 시간이나 때우다 가라'고 했다"는 등의 발언을 하여 논란이되었다. 그러나 방송직후 그녀의 발언이 다른 민간 잠수사 등에 의해 허위로 드러났다. 그녀는 조사에서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나오는 이야기를 사실로 믿고 발언했다는 취지로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그녀가 구조활동에 적합한 잠수 자격을 보유하지 않은 것으로도 전해졌다.[308]


부적절한 홍보

코오롱스포츠는 할인 행사 문의로 세월호 침몰 사고를 당한 실종자 가족을 위로하며 "더 늦기 전에 가족, 친구, 동료들에게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것은 어떨까요?"라는 내용의 문자 메시지를 보내 논란이 있다. 이에 코오롱스포츠 측은 트위터에 해당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 문자를 보냈다고 했다. [309][310]


해병대 전우회

4월 19일에 진도에 도착한 광주·전남 해병대 전우회 측은 민간 잠수단체인 한국수중환경협회가 바다 구조를 나가 천막을 비워둔 사이에 그 천막을 무단으로 점거하고 그 협회가 달아놓았던 협회의 현수막을 완전히 가리면서 '해병대 특수구조대 지휘본부'라는 자신들의 현수막을 동의도 없이 달아놓았다. [311] 한국수중환경협회는 사고 발생 직후 일찌감치 도착해 성실히 구조 활동을 하던 단체였고, 그 날도 회원 한 명이 구조 활동을 하다가 눈 부상까지 당했던 상황이었다. [312] 항의를 받은 뒤 협상 끝에 현수막을 위 아래로 나란히 거는 것으로 일단락 됐으나, 현장 자원봉사자들이 이런 자초지종을 트위터에 올려 해당 해병전우회원들이 누리꾼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313]


사고 관련 에피소드

세월호 승무원 박지영(22, 여)은 학생들에게 구명조끼를 양보하며 탈출을 도우며, 배에 끝까지 남아 있다가 결국 사망하였다. 생환자인 안산 단원고등학교 학생 김수빈(17, 남)은 “배가 기울면서 3층에서 난간을 붙잡고 있었는데, 승무원 누나가 뛰어내리라고 해 바다로 뛰어 내려 목숨을 구했다. 당시 10명이 함께 있었는데 구명조끼가 모자라 승무원 누나가 학생들에게 조끼를 양보했다”고 전했다. 또 그는 “누나는 왜 조끼를 입지 않느냐”고 묻자 “너희들 다 구하고 나도 따라 가겠다”라고 답하였다고 전했다. 덕분에 그와 함께 있었던 학생들은 모두 구조되었다고 전해진다.[314] 그 외에도 선원으로서 의무를 다 하다가 실종된 선원은 더 있었다. 세월호 사무장 양대홍(45)은 아내와 나눈 전화 통화에서, “배가 많이 기울어져 있어. 수협 통장에 돈이 있으니까 아이 등록금으로 써”라고 말했다. 아내가 “지금 상황이 어떠냐”고 묻자, 양 사무장은 “지금 아이들 구하러 가야 해. 길게 통화 못 해. 끊어”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한다.[315]


단원고등학교 2학년 6반 담임교사 남윤철(35)은 16일 오전 10시쯤, 선실 비상구 근처에 있어 탈출이 가능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학생들을 찾아다니며, 구명조끼를 나누어주는 등 대피를 돕다 사망하였다.[316]2학년 5반 담임교사 이해봉(32)은 난간에 매달려 있는 제자들의 탈출을 돕다가 실종되었고, 인성생활부 교사 고창석(40)도 제자에게 구명조끼를 양보하고 탈출을 돕다가 본인은 나오지 못했다. [317] 최혜정 교사도 사고 상황 속에서 SNS메시지를 통해 학생들에게 "걱정하지 마, 너희부터 나가고 선생님 나갈게"라고 말하며 학생들을 구출하였다. 이후 그녀는 탈출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교사 김초원 역시도 탈출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318] 구조된 후 자살한 강민규 교감은 앞장서 출입구를 열고 올라가 “너희 거기 있으면 다 죽는다. 힘이 들더라도 여기로 올라와야 한다”고 소리를 지르며 대학생 일행의 탈출을 도왔고, 먼저 구조될 수 있었음에도 “빨리 나와라. 이쪽으로 와라”고 외치며 끝까지 학생들을 구하다 나중에야 배에서 빠져나왔다.[319]


단원고등학교 학생 정차웅은 아수라장이 된 선실에서 구명조끼를 친구에게 건네주고, 물이찬 선실에 갇힌 친구들을 구하며 물속으로 뛰어들었고 끝내 사망하였다.[320] 단원고등학교 학생 양온유 역시 침몰 직후 갑판으로 나와 구조될 수 있었으나 선실에 남아있는 친구들을 구하기 위해 구명조끼를 입지 않은 채 다시 물이 차오르는 선실로 들어갔고 끝내 나오지 못한 채 사망하였다.[321]단원고등학교 학생 조대섭은 배가 기울자 여학생 방을 찾아 구명조끼를 나줘주며 대피하라고 알리고 여학생을 직접 끌고 올라오는 등 20여명을 구해냈다. 60대 아버지와 정신지체 2급 장애인 어머니와 함께 사는 조군은 육군 특전사에 입대해 봉사하는 것이 꿈이라고 밝혔다.[322] 단원고등학교 학생 박호진 역시 울고 있던 어린이를 급히 업고 구명보트에 뛰어올라 둘 다 생환할 수 있었다. 그는 “나도 네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며 “부모를 찾으며 울고 있는 아이를 두고 먼저 나올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323][316]


배관 설비사 김홍경(58)은 제주도에 있는 건축회사에 첫 출근을 하던 중 사고를 겪었다. 그는 배가 기울어지던 30여분 동안 주변 사람들과 함께 소방호스와 커튼을 묶어 선박 1층에 있던 학생 20여 명을 6~7m가량의 위층 난간으로 올려주었고 그 자신을 포함하여 이들은 모두 생환하였다. 그는, 그 사이에 1층에는 물이 가득 차는 바람에 더 많은 학생들을 구하지 못해 안타깝다고 밝혔다.[324] 화물 운전기사 김동수(49)는 사고 당시 여객선 3층 화물운송 기사 전용 객실에서 동료 기사들과 함께 있었다. 그는 배가 기울자 일반 객실이 몰린 4층으로 이동해 호스와 밧줄을 던져 10여 명의 사람들을 구하고 생환하였다. 특히, 그가 구한 이들 가운데는 가족들과 함께 제주도로 이사를 가다가 사고를 당한 어린이 권지연(5, 여)도 포함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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