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근처에 대안공간 루프와 같은 공간이 있다는 것. 쓰레빠 끌고 가볍게 담배 한대 피울 요량으로 나갔다가 마침 전시가 있으면 행운도 이런 행운이 없다. 루프를 가볍게 방문한 세월이 9년. 그러다 보니 어느새 뉴미디어의 흐름까진 아니어도 뉴미디어의 관람을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게는 되었다. 그래도 매번 큐레이터들의 해설?은 어렵다.
가수가 자신의 톤을 완성하고 데뷔하는 게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한 노력이면 가능한 데 반해 미술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포스트모던이후 세대에게 미술공부란... 휴... 쉽지가 않다.
[발:견/發:見/micro:scope] 안창홍 개인전
기간: 2013.7.18 – 2013.8.18(오프닝: 2013.7.18)
장소: 대안공간 루프
주최/주관: 대안공간 루프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Arts Council Korea)
작가: 안창홍
1990년대를 정의하기란 여간 까다롭지 않다. 그러나 1990년대를 정의하라면 1989년과 2001년의 틈새라고 말할 수 있다. 1989년은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시점이다. 사회주의의 거품이 드러난 시기이다. 즉 90년대는 80년대의 백크래쉬(backlash)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항생제이던 사회주의의 실체가 상쇄됨에 따른 파열음의 시작이 바로 90년대이다. 그리고 2001년의 911테러는 미국의 제동될 수 없는 확장주의의 명분을 제공했다. 신자유주의, 경쟁, 글로벌리즘과 같은 검증되지 않은 가치들이 크레딧이 되어버렸다. 이때부터 이미 미국은 제국의 가을을 완성했다. 모든 가치가 미국이라는 우주의 중심을 향해 돌기 시작했다.
1990년대의 설치미술은 전세계적으로 통용된 국제양식이었지만 그 근원은 레이거니즘의 문화정책에 있다. 우민화 정책은 스펙터클과 상품화된 섹시스트의 광기와 스피디한 일상의 전개를 숭상하도록 강요한 대중의 타락정책이다. 스펙터클과 스피디한 액션의 보급만큼 이라크나 팔레스타인에 대한 대외강경정책에 대중을 무감각하게 만드는 효과도 없다. 이러한 헐리우드 장려책은 미술계에서도 한스 하케나 다니엘 뷔랭과 같은 고함(高喊)의 정치학이나 마크 로스코의 종교적 숭고 등 모더니티를 지루한 과거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설치미술은 가시성(可視性)의 양적 부피를 무기로 삼는 예술의 글래머화에 불과하다.
한국의 경우 메이드 인 재팬 (1920년대~1950), 메이드 인 아메리카(1960년대~1990)의 미술의 자발적 수용만이 역사의 궤도를 잠식했을 뿐이다. 그런데 문화란 사회를 살아가는 구성원이 몸과 마음으로 부대끼며 살다가 얻어낸 실존적 체험이어야 한다. 맨하튼의 모던한 스카이라인과 편익을 누리지 못하고 미니멀리즘을 구성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모던의 삶 없이 미니멀리즘의 표피만을 흉내 냈다는 사실에 우리의 비극이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의 실존적 긴박함을 전면에 내세워 용기를 보여준 최초의 사례는 우리 정치사회적 배경의 문제점들을 스스로 각성하면서 발화시킨 민중미술에서 거의 유일하게 발견된다. 실존적 체화성을 미술의 실천과제로 초지일관 견지했던 민중미술가의 삶에서 한국적 현실의 설치미술과 영상과 조각과 회화의 가능성이 태어났다고 말해도 틀림없을 것이다.
그간 민중미술은 사회적 프로파간다로서 1980년대 한국 미니멀리즘에 충돌했던 두 개의 커다란 기단(氣團) 정도로 해석되곤 했다. 그러나 현재를 현재의 가능성으로 태동시켰던 태도의 뿌리야말로 민중미술가의 삶 속에 있었다는 긴박한 진단이 도처에서 내려지고 있다.
오윤, 신학철, 안창홍, 등 희대의 예술가들이 신화로 화석화되는 비극을 종식시키고 생생한 삶의 현장의 영원한 과정으로 해석하고자 이번 전시를 기획하려 한다. 젊은 신진 비평가, 큐레이터들의 생생한 난상 토론을 거쳐 과거 민중미술가의 일원이었던 개체적 사실이 아니라 영원히 정의될 수 없는 생생한 예술적 삶의 증거로 보여주고자 함이 전시의 참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인식하는 민중미술가의 예술에 대한 편견을 거칠게 대별하면 다음과 같다.1. 프로파간다로서의 회화
2. 자아의 분열적 양상, 신경질적 강박
3. 시대에 대한 비판
그러나 이번 전시는 위에서 상기한 예들과 다른 지점을 부각시키려고 한다. 첫째, 불운한 시대에 고착된 불운을 이야기한 산물이 아니라 희망을 예증했다는 점. 둘째, 그것이 단순한 정치적 내용의 막연한 표출이 아니라 새로운 회화적 실험 역시 감행했던, 그리고 여전히 진행 중인 엄중한 미적 모험이었다는 점. 셋째, 진부한 질서에 대한 영원히 자포(自暴)될 수 없는 젊은 에너지의 현재적 진행이라는 점. 대체로 이 세 가지와 같다.
이번 전시의 제목은 <발:견/發:見/micro:scope>이다. 보는 행위를 외부로 발산시키라는 뜻이며 특히 그 외부의 대상이 사회적 정황이나 역사적 상황인식 그 자체보다도 미감 자체에 주목하자는 뜻이다. 이 전시는 제목에 담긴 의도처럼, 새로운 작업을 선보이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작가가 해왔던 작업들에서 다른 시각, 새로운 담론을 이끌어내는 것이 목적이다. 이전까지 작가에 대해 충분히 말하지 못했던 새로운 스토리를 중심으로 작품을 선정했으며, 그 의미를 재조명하는 세미나와 출판물 제작을 병행할 것이다.
안창홍 작가는 말할 것도 없이 자기가 살았던 시대를 아파했던 사람이며 권력으로부터 자본으로부터 중심으로부터 밀려간 사람들을 사랑했던 사람이다. 민중미술은 하나의 정치적 세력을 형성했으며 동시에 사회에 끊임없이 자신들이 원하는 요구를 발언했던 문화 운동이었다. 그러나 작가는 시대의 아픔과 인간의 생래적 아픔을 일상에 섞어낸 도발적 감각과 희화적 제스처로 극복하려던 사명감을 표출했을지언정 민중미술을 자기 목적의 계기로 받아들인 적이 결코 없었다. 작가는 새로운 회화를 창출하는 사람으로서 과거의 미적 선례를 극복하고 새로운 회화의 비전을 얻고자 분투했다. 더욱이 자신의 인생과 예술이라는 형식이 일체화되기 바랬던 한 사람이다.
안창홍 회화의 본질은 사랑이다. 그것이 여타 민중미술가와 작가를 구분시키는 바로미터다. 일반적인 민중미술가는 권력가와 부르주아를 타도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어째서 자신의 감정이 그런지 모를 때가 많다. 안창홍 작가는 권력과 부르주아의 속성을 이해한다. 권력과 부르주아는 편법의 비겁함과 부조리, 죄악에 대한 무반성과 무감각을 수반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과업이라는 사실을 작가는 정확하게 통찰한다. 이 불가능한 과업의 실체는 변형된 욕구를 사회로부터 창출시킨다. 첫째, 그것은 인명을 경시한다. 그리고 그것은 공동체의 애정과 존중에 분열의 금을 조장한다. 둘째, 인간 천연의 감각인 사랑과 애욕을 변질시켜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시킨다. 가령, 사회를 번잡한 욕구의 용광로로 응축시킨다. 왜 그런지도 모른 채 그에 순응하도록 조장한다. 사랑과 애정의 본질은 인간에 대한 신뢰이고 동반이다. 이 신뢰에는 영과 육의 철저한 일체화라는 전제가 따른다. 또한 신뢰를 구축하려면 시간의 물결이 좌절시킬 변화를 막아 설 용기와 의지라는 이름의 둑을 건설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욕구의 조장은 사랑의 본질을 파괴시키며 영과 육을 이원화시킨다. 그리고 인간사에서 지배의 메커니즘은 언제나 그러했고 변하지 않았다. 따라서 욕구는 현시대에 있어서도 여전히 종교의 자리를 꿰차고 있다. 즉, 종교처럼 맹목의 시선을 강화시킨다. 이 거짓 종교에 대한 풍자와 희화화, 그리고 내면화된 반성이야말로 작가가 그토록 희구한 인간 본질의 탐구를 위한 기나긴 여정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발:견/發:見/micro:scope>에 등장하는 회화 속 인물들은 교태를 자랑한다. 그리고 요염하다. 작가는 세상만사 모든 것, 심지어 원자나 분자마저도 순환한다고 본다. 그것은 기뻐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자연의 모든 삼라만상은 기쁘기 그지없는 감정, 즉 엑스터시 때문에 순환되고 유지된다. 하물며 인간은 어떻겠는가? 인간은 그런데도 질시와 반목과 음모와 지배의 정치학을 벌인다. 인간의 최소한의 기쁨조차 차단하는 것이 지배의 정치학이요 권력 창출을 위한 무경계의 창조력이다. 이것은 인간이 영원히 지니고 부담해 가야 할 생래적 아픔이다. 이 본연적 아픔과 모순을 치유하는 대속(代贖)의 장(場)에 자신의 예술과 인생을 참여시키고 송두리째 투입시키고 싶은 작가의 정신을 조금이나마 노정시키려는 것이 이번 전시 <발:견/發:見/micro:scope>의 지향점이다. 아픔은 미움으로 극복되지 않는다. 그것은 감각적으로 일탈적이건 종교적 고고함이건 역시나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서 새로운 희망을 본다.
이진명, 대안공간 루프 협력 큐레이터|
Lee Jin-myung
Associate Curator, Alternative Space LO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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