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7일 파리에서 일어난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의 논의가 아직 진행중이다. 박노자, 유시민, 김어준 등은 <샤를리 에브도>의 '풍자'가 약자를 향한 '폭력'아니냐고 했다. 필자도 그들의 의견에 동조한다.
유럽내 노동시장에서의 그들은 철저하게 '약자'다. 그런데 그들을 가리켜 자신들의 일자리 빼앗는 '강자'(도둑)이니 몰아내야 한다는 극우주의자(백호주의)들이 세를 키우고 있다. 또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언론을 통해 그들의 종교는 극단적이고 언제든지 '테러리스트'로 돌변할 수 있다는 '공포심'을 조장하고 있다.
'이슬람=극단주의=테러'를 이용하여 이익을 취하려는 진짜 '악'이 있음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최근 아베는 IS를 이용하여 자국민 두명(고토 겐지, 유카와 하루나)을 희생시켜 평화헌법 개정를 꽤하고 있다. 인질 살해는 용서받지 못할 악행이다. 그러나 우리는 들어나지 않는 '악행'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아래 장정일이 말하는 타락한 '관용'은 맥락상에서 어긋나지 않게 이해된다. 하지만 숫자로 그들을 강하다고 하는건 오류다. 문화의 힘으로 '풍자와 조롱에 맞서라'지만 그건 문화담론에 지나지 않는다. 유럽내에서 그들에게 그럴 힘이 정말 있다고 생각 하는가?
'극단주의'에 대한 감상 - 박노자
딱 1주일 전에 제게 생긴 일이었습니다. (중략) 프랑크푸르트의 지하철, 공항으로 가는 길...한 역에서 제가 탄 차량에 돌연히 터키나 아랍계 출신으로 보이는 한 남성이 탔습니다. 그의 얼굴표정에는 모종의 비장한 희열 같은 것이 역역히 보였습니다. 그 벨트 뒤에 긴 칼을 차고 있었고요. 그는 타자마자 그 칼을 빼고 저를 포함한 거기에 앉은 몇 명의 백인들을 아주 자세히 응시했는데, 일단 문이 닫힐 때까지 기다려보자는 심산인지 결국 칼을 다시 벨트 안에 넣고 무슨 종교 음악 같은 것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얼굴을 본 뒤로는 제 등에 식은 땀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긴 칼에 제 목아지가 날라가는 것을, 벌써 상상하기 시작한 거죠.
그러나 왠일인지 문은 계속 닫히지 않았습니다. 이상했습니다. 약 5분이 지나자 그 문 안으로 중무장한 경찰 몇 명이 막 들어왔습니다. 들어오자마자 그 중동계 남성을 잡고서 끌고 나갔습니다. 그러고 나서야 드디에 폐문되고 열차가 출발했습니다. 신고가 이미 접수돼 지하철 곳곳에서 포진된 무장경찰들이 기회를 기다렸듯 이런 "잠재적 테러리스트" (?)를 사냥했던 모양입니다. 그 남자가 누구이었는지, 이 칼로 뭘 하려 했는지, 그리고 잡힌 뒤의 그의 운명이 어떻게 됐는지, 저는 끝내 알 수 없었습니다. 열차가 떠나고 만 거죠. (중략)
우리 (즉 구주의 중산층 백인 고학력자)들이, 우리들을 그들 (즉 이만자 계통의 새로운 무산계급)의 눈으로 본다면 과연 어떻게 보일까요? 어릴 때부터 물려받은 문화자본 덕에 대학교수 등등의 "편리한 자리"들을 두루 다 차지하고, 각종 회의 후원 등 대자본과 국가가 주는 혜택들을 두루 다 차지하고, 남들이 아이를 먹여살리려고 피나도록 노동하는 그 사이에 실제 약자와 무관한 "약바 보호" 이야기나 남의 돈으로 하고, 그러면서도 노동자가 무슨 요구라도 하면 싫은소리부터 하는 "짠" 고객의 노릇을 한, 이런 모습들은 과연 그 분들의 눈으로는 어떻게 보일까요? 이슬람계의 일부 청년들이 칼을 차고 지하철에 소요하는 등 "극단주의적" 모습을 보이는 것은, 과연 오로지 광신적 종교 때문일까요? 오히려 이와 같은 하루하루의 소외, 피착취의 경험으로부터 오는 절말의 결과는 아닐까요?
일상 속에서는 그들에 대해서는 우리는 가해자들입니다. 우리가 호의호식하는 하루하루는 그들에게 피해를 줄 수밖에 없죠. 폴크스베간이 우리에게 주는 연구비가, 결국 그들이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대공장들의 노동자들로부터 수탈한 잉여가치의 일부분이라는 점부터 생각해볼 만합니다. 물론 그들의 비극을, 개개인의 칼질이 해결하지 못할 것도 뻔합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봐도 이게 맞는 길은 아니겠죠. 한데, 제 목아지는 그렇게 해서 칼에 날라가도, 저는 항의할 만한 입장에 서있지 못합니다. 남의 피땀을 빨아먹은 만큼 천벌을 받는 것일 뿐이니까요.
전문 - http://blog.hani.co.kr/gategateparagate/72012
'이슬람근본주의와 '관용'의 탁락한 사용법 - 장정일
2015년 1월7일, 파리에서 일어난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에 대한 논의가 끝날 줄 모른다. <한겨레> 지상에서도 여러 칼럼니스트와 독자가 의견을 밝혔다. 그 가운데는 <샤를리 에브도>의 풍자가 약자를 향한 폭력이라는 주장이 많다. 샤를리 에브도의 과격한 풍자를 꾸짖는 사람들은 상식처럼 보이는 ‘표현의 자유’가 알고 보면 서구 중심주의적인 폭력이며 서구 세속주의자에게만 유효한 무기라고 비난한다. 풍자를 당하는 이슬람은 서구 주류 사회 안의 절대 약자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진정한 관용은 약자를 보살피고 개별성을 배려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오만한 서구 대 핍박받는 이슬람’이라는 구도로 이번 사건을 본다. 하지만 그런 설명은 쿠아시 형제를 지도한 이슬람근본주의에 눈감는 반쪽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영미 제국주의가 중동에 심어놓은 이스라엘이 이슬람근본주의를 불러왔다거나, 쿠아시 형제가 이슬람근본주의에 심취하여 예멘 알카에다와 접속하게 된 원인 또한 프랑스 다문화주의 정책의 실패에서 찾는 분석이 흔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중략)
관용은 샤를리 에브도 사건 이후 가장 많이 들먹여진 용어다. 모두들 관용에 대해 한마디씩 하지만, 관용의 가장 타락한 사용법은 ①상대방을 아이로 취급하면서 상대방의 환상을 깨지 않으려는 태도이며, ②어떤 진리든 진리를 주장하는 것은 모두 폭력이라는 발상에서 출발한다. 즉 우리는 ①, ②의 태도와 발상을 간직한 채 이슬람을 ‘아이’ 취급하고, 그들에 대한 이의 제기를 ‘폭력’ 행사나 되는 양 자기 검열을 해온 것이 아닌가? 과격하게 말해, 비판이 필요한 근본적 차이를 문화적 차이와 생활 방식의 차이로 변질시키고, 미소 띤 얼굴로 표현의 올바름에만 신경을 써온 허다한 프랑스 지식인들의 타락한 관용이 풍자만화가들을 참극으로 내몬 게 아닌가?
결코 이슬람은 약자가 아니다. 이슬람은 천주교와 개신교를 합한 숫자를 제외하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신도를 가진 종교다. 이슬람은 고령화되어가는 다른 종교와 달리 가장 많은 20대 신도를 가졌다. 서구로 유입되는 이민의 대다수도 무슬림이다. 이슬람은 서구를 향해 자신을 아이 취급하고 예외로 다루어 달라고 더는 징징거리지 말아야 한다. 이슬람이 진정 유서 깊은 역사와 지혜를 간직하고 있다면, 그들이 길러온 문화의 힘으로 풍자와 조롱에 맞서야 한다.
전문 -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67684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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