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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 강의

테무진to the칸(6) 달콤한 인생

by 속 아몬드 2013. 10. 30.

테무진to the칸(6) 달콤한 인생


2011.02.18.금요일

필독

 

 

intro

 

혹시 저번 편들 안 보고 본 기사를 읽으시려는가? 

그렇담 빨리 텨가서 보고 오시라. 얼렁.

 

 

1

 

(전편에 이어)자신을 기다려준 보르테와 재회한 테무진이 얼마나 감격했을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장인 데이 세첸은 딸을 시집보내게 된 게 다행인 모양이었지만, 보르테의 어머니 ‘초탄’ 여사는 갑자기 딸을 빼앗기게 된 게 못내 아쉬웠나 보다. 그녀는 딸이 시집가는 길을 내내 따라왔다. 사돈댁이 엽기적으로 가난했으니 걱정했을 만도 하다.

 

테무진이 벨구테이와 동행한 이유는 어머니의 경우를 떠올려서였을지도 모른다. 헐룬은 신랑 한 사람의 에스코트를 받다가 홀랑 납치되어버렸다. 성격도 드세고 싸움도 제법 하는 벨구테이는 든든한 보디가드였을 것이다.

 

한편 보르테는 화려한 신부복장을 하고 있었다. 부유한 옹기라트족의 신부예복이니 꽤나 값이 나갔을 것이다.

 


신부를 꾸며라

 

또, 신부는 수레를 타고 시댁으로 떠나는 법이다. 다 재산이다. 노동력과 기술, 재료가 많이 들어가는 수레는 초원에서 큰 재산이다. 뭐, 초원보다 100배는 풍요로운 중국에선 걍 수레지만… 테무진이 처가에 뭘 주었는가는 역사에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한마디로, 안 줬다는 얘기다. 이정도면 아버지가 자행한 약탈혼과 크게 다르지도 않다.

 

보르테와 정식으로 혼인하고 깨알같은 신혼을 보내고 있자니, 테무진은 이 행복이 정말로 지킬 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끼게 된다. 우리는 테무진이 이룩(또는 자행)한 어마어마한 업적 때문에, 그가 정복유전자를 타고난 사나이 중의 사나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고생을 많이 하고 산 사람들은 보통 ‘원대한 꿈’ 따위 꾸지 않는다. 그들에게 인생 최대의 목표는 그저 행복하고 안락한 삶이다.

 

테무진은 아버지를 잃고 나서 처음으로 사람답게 살고 있었다. 자유의 몸이고, 가난하지만 먹을 것도 있고, 사랑하는 부인도 있었다. 그러나 이 행복을 지키려면 최소한의 방어력이 있어야 했다. 무기를 휘두를 수 있는 성인 남자 하나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도둑맞은 말을 찾으면서 만났던 보르추 생각을 하게 된다. 보르추… 어쩐지 만사 제치고 달려와 인생을 함께해 줄 것 같은 녀석이었다.


 

테무진은 부자양반 나코의 으리으리한 집… 아차, 게르는 으리으리할 수가 없다. 구조상 거기가 거기다(다만 크기엔 차이가 있다.). 하지만 개미떼처럼 펼쳐진 그의 가축떼는 정말 압도적인 풍경이었을 것이다. 여튼, 나코의 집에 벨구테이를 보낸다. 메시지는 간단했으리라.

 

“어이, 부잣집 아들. 가출해서 나랑 같이 가난하게 함 살아볼래?”

 

보르추도 몸이 근질거리던 참이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말도 하지 않고 벨구테이를 따라왔다. 사실 테무진은 그에게 훌륭한 모습을 꽤 보였다.

 

: 첫째, 그는 보르추의 도움에 확실히 감사할 줄 알았다. 절박한 처지의 인간, 그것도 어린 인간에게는 발견하기 힘든 장점이다.

 

둘째, 자신을 대신해 위험을 감수하게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이미 베풀어준 것(추적길에 동행하고 말을 빌려준 것)으로 충분하다고 느꼈고, 자기 때문에 보르추가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앞장서는 모습을 보였다. 목숨을 건 상황이었다. 이건 인정받아 마땅한 소양이다.

 

셋째, 말 8마리를 되찾고 나서 말로만 고맙다고 한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은혜를 ‘갚으려고’했다. 테무진은 말 한 마리도 절박한 처지였다. 그런데도 굳이 몇 마리나 떼주려고 한 것이다. 보르추가 뎁따 부자인걸 뻔히 아는데도. 철저하게 공정한 원칙주의자인 거다. 나이에 비해 매우 조숙한 행동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초원에선 웬만한 어른도 보여주기 힘든 태도였다.

 

보르추는 테무진에게 굉장한 매력을 느끼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래도 철이 없었던 건 확실하다. 부잣집 후계자 자리를 내치고 테무진과 함께한다고 냉큼 벨구테이를 따라왔으니. 아버지 나코씨의 심정이 어땠을지 상상이 간다. 아이구 내 멀쩡한 아들이 하필 친구를 잘못 만나서…

 

몽골초원에 ‘서식’하던 집단의 조직논리는 기본적으로 혈통-가족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따라서 테무진이 가장인 집안의 캠프에 이사왔다는 건, 기꺼이 테무진의 부하가 되겠다는 뜻이었다. 여기서 테무진의 카리스마를 알 수 있다. 그러나 테무진의 카리스마는 ‘내추럴 본 아우라’가 결코 아니었다.

 

테무진은 말하자면 ‘굼띤’ 인간이다. 믿을 만한 가치가 있는 인간인지를 몸소 증명해서 신뢰를 얻는 ‘몸빵 카리스마’, ‘노가다 카리스마’의 소유자였다. 이 무척이나 저렴한(그리고 답답할 정도로 성실한) 리더쉽이 결국 인류사의 운명을 바꾸게 된다.

 

 

2

 

그러던 어느날. 손님이 찾아왔다.

 

“어떻게 오셨나요?”

 

“초탄 마님께서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아니 웬 선물을…?”

 

“아, 결혼 예물이요.”

 

초원에서는 따로 혼수라고 부를 만한 게 없다. 결혼 예물이래봐야 한 사람이 지참하고 다닐 수 있는 물품이 전부다. 참 소박하다. 신랑의 아버지는 먼저 아들을 사돈집에 떨궈놓고 올 때 선물을 하나 준다. 거꾸로 데릴사위기간이 끝나고 신부와 신랑이 시댁으로 떠날 때는 신부가 선물을 지참해 온다. 보통 옷 한 벌을 준비해 오는 게 관습이었다.

 

사돈댁의 스펙이 영 맘에 안들어서였을까? 아니면 갑작스레 딸을 시집보내느라 준비를 못한 걸까? 초탄 아줌마는 헐룬에게 선물을 들려 보내지 않았었다. 그게 못내 마음에 걸렸나 보다.

 

선물의 정체는 검은 담비의 모피로 만든 외투였다. 초원 바깥에서 ‘수입’하지 않고 만들 수 있는 것중엔 그야말로 최고급품이었다.

 

보르테를 묘사한 그림.

보르테가 직접 담비 외투를 들고 시집온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테무진 가족은 “들쥐와 개의 가죽”을 기워 만든 누더기를 입고 있었다. 모두들 검은 담비 모피의 럭셔리한 포스에 눈이 휘둥그레졌을 것이다.

 

“이걸 어따 써먹을까…”

 

그냥 게르 안에 걸어두나? 아니면 내다 팔아서 말이나 좀 더 구할까? 잠깐 그 전에 한번만 입어보고…

 

테무진은 벨구테이, 카사르와 의논한 끝에, 모피를 들고 커레이트족의 ‘옹 칸’을 찾아가기로 결정한다(옹 칸과 커레이트족에 대해선 본 시리즈 2편을 냉큼 보시라.). 원래 처가에서 보내는 예물-주로 옷-은, 신랑 아버지의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게이는 죽고 없다. 그렇다면 ‘아버지에 해당하는’ 사람이 대신 받을 수 있다.

 

옹 칸, 그러니까 본명으로 말하자면 토그릴은 예수게이의 안다였다. 안다는 피로 맺은 의형제. 친형제보다도 더 가까운 관계다. 아버지의 안다는 의붓아버지라고 해도 무방하다. 토그릴은 흔쾌히 담비옷을 받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토그릴에게 선물을 증정한 건 다 생각이 있어서다.

 

토그릴은 예수게이의 도움을 받아 커레이트의 칸이 되었다. 그는 예수게이와 짝을 이뤄 타타르족에 대항했지만, 자신을 왕좌에 앉혀준 사건은 너무 사이즈가 컸다. 받은 만큼 줄 기회가 없었더 것이다. 이런 건 초원에서 빚으로 남는다. 예수게이의 ‘채권’은 테무진이 승계했다고 볼 수 있다.

 

테무진은 토그릴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와 아버지의 옛일을 들먹였다. 이 상태에서,

 

“나 너같은 아들 둔 적 없는데?”

 

하는 건 초원에선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로 부끄러운 짓이었다.  

 

담비옷은 고급이었지만, 토그릴이 옷 한 벌에 혹해 양자를 얻을 정도로 한가한 사람은 아니었다. 커레이트 몇 개 부족 연맹체. 원시적이긴 하지만, 초미니 ‘국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게다가 초원 바깥과 소통하고 있었다. 무역도 했고, 문물도 받아들였다. 그중 대표적인 게 바로 기독교였다. 토그릴도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그의 눈에는 아직도 무속신앙을 유지하며 ‘텡그리(하늘)를’ 모시는 몽골족이 무척이나 촌스러워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테무진은 손님이었다. 먼 곳에서 찾아왔는데 친절히 접대하는 건 초원의 불문율이다. 테무진 일행이 실컷 먹고 마시다가 답례조로 선물을 내밀면 안 받기도 참 어색하다. 여러모로 선물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예물을 받는다는 것 곧 아버지 노릇을 해야 한다는 뜻. 이렇게 해서 테무진은 든든한 보호자를 얻게 된다.

 

 

3

 

당시 몽골초원과 동-중앙아시아에는 기독교가 많이 펴져있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수백 년 동안 ‘선교 경쟁’을 하고 있었다. 동쪽으로 와 목숨을 걸고 전도할 독실한 사제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라는 인물이 없었다면 몽골초원 중앙까지 기독교가 전파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네스토리우스는 서기 428년에서 431년까지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로 재직하던 인물이다. 성직자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를 경험한 셈이다. 네스토리우스는 시리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스승도 시리아에서 만났다. 스승의 이름은 ‘테오도르’. 그는 일명 ‘안디옥 신학파’의 교리를 계승한 인물이었다.

 

당시 서구 기독교사회는 안디옥 신학파가 내세운 새로운 교리와 기존의 교리가 대립하고 있었고, 이로 인한 기독교계의 파벌싸움이 극성을 부리고 있었다. 네스토리우스는 물론 스승의 교파에 속했다. 그렇다면 안디옥 신학파의 교리란 대체 무엇일까.

 

기독교는 그리스도 삼위일체설을 주장한다. 삼위일체란 성부(하나님)-성자(예수 그리스도)-성령이 하나의 존재라는 뜻이다. 예수는 인간의 육체를 가졌지만, 신의 아들이면서 신의 일부, 신 그자체이기도 하다(이슬람교는 예수를 모세, 무함마드와 같은 ‘선지자’로 해석한다.). 

 

안디옥 신학파 : 성부 성자 성령, 즉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은 일심동체다. 그것까진 좋은데… 예수님은 인간일까 신일까? 인간이면서 동시에 신인 상태가 존재할 수 있을까? 인성과 신성은 하나가 될 수 없지 않을까? 그 둘은 분리될 수밖에 없다고.

예수는 기본적으로 인간일 수밖에 없어. 그러니까 성령이 깃들기 위해 준비된 ‘인간의 신체’라는 거지. 물론 몸 안에 인간의 영혼도 갖고 있었겠지만, 그건 성령하고 섞일 수 없다. 그러니까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예수’와 ‘신으로서의 예수’를 구분해야 해.

그리고 우리 성모 마리아님… 물론 참 훌륭하신 여인이셨는데… 그분이 잉태한 건 분명히 성령이 아니라 인간의 신체였다고. 어떻게 여자 사람이 성령을 잉태하고 낳을 수 있어? 그러니까 ‘신을 낳은’ 성모(聖母)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위대한 분을 낳은 ‘그리스도 모(母)’라고 불려야 마땅해.

 

네스토리우스는 자신과 스승이 속한 교파의 교리를 적극 지지했다. 총주교라는 그의 위치상 더 이상 쉬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기존의 삼위일체설과 안디옥 교파의 ‘신인이성설(神人二性設)’ 중 하나는 이단이 되어야 했다. 결국 ‘에페수스 공의회’에서 결론이 내려진다.

 

“신인이성설은 이단이다.”

 

결국 네스토리우스는 시리아로 추방되고 만다(그래도 그는 낙심하지 않고 시리아에서 열심히 저술활동을 했다.). 그만 시리아에 간 것이 아니다. 안디옥 교파에 속한 사람들, 신인이성설을 지지하는 사람들 중 일부도 시리아에 정착하게 된다. 그리하여 시리아에서 ‘네스토리우스 교파’가 생겨났다. 네스토리우스는 신인이성설의 창시자는 아니지만, 가장 높은 자리에서 추방자가 됨으로써 교파의 상징이 된 것이다.

 

네스토리우스 교인들은 법적으로 이단이었기 때문에, 기존의 기독교 세계에서는 발을 붙일 수 없었다. 그래서 안전한 페르시아 땅으로 건너가 동방 전도를 시작하게 된다. 7세기엔 중앙아시아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경교’로 불린 기독교는 8세기의 당나라 문헌에도 등장한다. 당 현종의 칙령이다. 현종황제의 칙령 내용은 이렇다.

 

“음 우리가 경교(기독교) 사당(교회)을 교회를 ‘파사사(波斯寺)’라고 부르는데 말야… 페르시아에서 온 종교의 사찰이란 뜻이잖아? 그런데 이 종교가 생긴 곳은 원래 대진국(大眞國 : 로마)이란 말이지. 그러니까 이제부터 파사사라는 일반명사를 “대진사”로 바꿔 부르도록 하자.”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 : ‘기독교가 중국땅에 널리 퍼지게 된 것을 기념하는 비석’이라고 풀면 될 것이다. 781년 1월 7일에 제작되었다. 한자와 시리아 알파벳이 병기되어 있다. 경교(景敎)는  ‘(이치를) 밝게 비추는 종교’라는 뜻이다. 참 잘 지은 이름이다.

당나라에 유입된 기독교, 즉 ‘경교’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일 가능성은 매우 높다. 하지만 100% 장담할 순 없다. 결정적인 사료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워낙 정설로 굳어지고 있는 만큼, 우리는 경교를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라고 이해해도 문제될 건 없다.

비석에는 삼위일체의 개념이 등장한다. 삼위묘신(三位妙身)이라고 표현되고 있지만, 글자만 조금 다를 뿐 삼위일체를 뜻한다.

 

 

4

 

달마, 아니 기독교가 동쪽으로 온 까닭은 위와 같다. 초원의 유목민 기독교도들은 자신들을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토마’사도의 후손이라고 믿었다. 성경에 따르면 토마는 전도를 하러 동쪽으로 갔기 때문이다. 인도엔 2000년 전부터 기독교도들이 있었다. 이들도 자기 신앙의 선조가 토마라고 믿는다.

 

서기 1세기경 인도에 세워진 교회. 토마 사도가 생전에 지은 교회라는 믿음이 있다. 보다시피 그리스-로마식 건축이다.

 



인도 뭄바이에 있는 ‘성 토마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 가운데가 토마 사도이다. 좌우 양쪽에 대천사 가브리엘과 미카엘이 있다.

 

기독교는 머나먼 서쪽이 고향인 종교다. 사도 토마의 전설은 인도, 중앙-동아시아 기독교도들의 신앙심을 고취시켰다. 토마님 덕분에 자신들도 신앙의 적법한 계승자가 되기 때문이다.

 

한편 유럽인들은 그들대로 동쪽의 소식에 흥분했다. 아니 그 먼 동쪽에도 우리의 형제들이 있단 말이지…? 유럽인들은 기독교vs이슬람의 종교전쟁을 겪으면서 한가지 환상을 품게 됐다.

 

“무슬림 것들이 서식하는 곳보다 더 동쪽에 ‘사제왕’ 요한이라는 분이 있다던데? 그분은 기독교 사제이면서 왕인데… 아주 강력한 왕이 되어서 자기 백성들을 죄다 기독교도로 만들었다고 하더라구. 이분이 가만 있을리가 없잖아? 우리가 이렇게 고생하는데 말야. 이분도 군대를 이끌고 아랍을 침공하지 않겠어? 이렇게 동서 양쪽에서 기독교 군대가 아랍을 치면, 그걸로 게임 오버야! 그런거야! 데우스 엑스 마키나!!”

 

물론 사제왕 요한은 없었다. 그러나 유럽인들이 ‘이분이 요한이다’라고 생각한 인물들은 몇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옹 칸(토그릴)이었다. 15세기 프랑스에서 그려진 아래 그림 속 주인공, 유럽인이 아니라 옹 칸이다. 묘사가 엄청 잘못되긴 했지만…

 


옹_칸_만세_자_이제_무슬림들을_죽여줘

 

그렇다. 옹 칸도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것이다. 왜 옹 칸과 그의 가족을 비롯한 많은 초원사람들은 기독교를 믿었을까? 지리적으로 이슬람교를 믿기가 훨씬 쉬웠을 텐데 말이다.

 

구약은 유목민인 유대인들의 경전이자 역사서다. 신약이 발생한 배경도 유목생활과, 100%는 아니지만 밀접한 관계가 있다. ‘길잃은 어린양’ ‘주는 나의 목자(shepherd, 즉 목동),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등의 표현은 초원 사람들의 감성에 팍팍 와닿았을 것이다.

 

어, 그런데 이건 이슬람교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이슬람교는 서역의 사막 유목민 문화를 손쉽게 장악했다. 그러나… 음주습관이라는 거대한 장벽이 있었다. 초원의 유목민들에게 술을 먹지 말라고 하는 건 식신불패 방장 충용무쌍님에게 평생 야채만 먹고 살라는 것과 비슷한 주문이다. 뭣하러 알콜을 금하는 이슬람 믿는가? 비슷하면서 술 실컷 마실 수 있는 기독교가 있는데.

 

그리고 초원의 유목민들은 절대다수가 문맹이었다. 3.0 이상의 시력, 활솜씨, 예민한 감각, 육감, 스테미너, 기억력(문자가 없었으므로 말을 기억하는 능력이 대단했다.), 말타는 솜씨, 자연과 사물에 대한 관찰력 등 뛰어난 점이 많았지만, 정주-농경문명의 엘리트들이 보기엔 걍 무식쟁이들이었다. 말하자면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로 이어지는 ‘유일신교 패밀리’의 형이상학적인 교리를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이 세 종교 중 유독 기독교는 예수라는 ‘사람’을 통하니까 더 쉬운 면이 있다. 유목민의 전통적인 신앙은 정교한 교리나 체계적인 교단을 갖춘 종교가 아니라 샤먼을 중심으로 한 토템신앙의 형태였다. 기독교 신자들은 찬성하지 않겠지만(물론 찬성 안해도 된다.) 민속학의 입장에서 관찰하면, 예수가 ‘광야에서 보낸 40일’은 무당들의 일반적인 ‘신내림’ 과정과 일치한다. 예수가 사람의 몸에서 돼지떼의 몸으로 귀신을 ‘이사’시키는 것도 전형적인 무속신앙(샤머니즘)의 형태를 띠고 있다. 따라서 초원 사람들에게 예수는 ‘하나님’이라는 최강의 신을 모시는 강력한 무당으로 해석됐다.

 

마지막으로 – 이슬람교는 기독교보다 더 엄밀한 면이 많다. 무슬림의 입장에선 십자가와 예수상, 성모 마리아상 등을 마련해놓는 것은 죄다 ‘우상숭배’이다. 어차피 물질에 불과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원 유목민들 입장에서는 : 아니 뻥 뚫린 초원에서 암것도 안주고 뭘 믿으라는겨…?

 

십자가와 성모상은 토템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매우 친숙하게 다가왔다. 게다가 뻥 뚫린 개활지에 사는 유목민들은, 특정한 물건을 귀하게 여기기도 하지만 동사남북의 네 방향 자체도 매우 신성시한다. 십자가는 딱 사방위(四方位)를 가리키는 것처럼 생겼다.

 

십자가가 새겨진 몽골의 옛 비석

 

사람과 가축, 집이 수시로 이동하는 초원엔 고정된 교회가 있을 수 없었다. 초원의 네스토리우스파 사제들은 게르마다 돌아다니면서 예배를 드렸다. 네스토리우스파 사제들의 인종은 참으로 다양했다. 그리스인, 시리아인, 페르시아인, 아랍인, 인도인, 돌궐족 등등. 그 중에는 위구르족도 있었을 것이다. 위구르족은 지금은 중국의 신장위구르 자치구에 전 종족의 80%이상이 모여 살며 이슬람교를 믿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위구르 문자는 네스토리우스파 사제가 전도를 하면서 생겨났다. 네스토리우스파가 최초로 발생한 지역인 시리아의 알파벳을 변형해 만든 문자다. 몽골초원에도 위구르 문자로 기록된 성경책이 있었다. 아마 위구르어 성경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어차피 초원 말과 위구르 말은 서로 비슷한 사투리라(게다가 당시엔 지금보다 훨씬 더 유사했다.), 글만 깨치면 읽고 이해하는 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글을 모르면 사제가 읽어주면 된다. 또한 성경책 자체가, 그 안에 적인 내용과 상관없이 일종의 토템 역할을 했다.

 

자, 이쯤 하고 다시 테무진 이야기로 돌아가자.

 

 

5

 

담비모피 한 벌로 ‘안전보험’을 들고 온 테무진에게 좋은 일이 생겼다. 웬 노인이 테무진과 동갑이거나, 많아봐야 한 살 많은 자신의 아들과 함께 온 것이다. 이 소년의 이름은 ‘젤메’. 중요한 이름이니 꼭 기억해두자.

 

젤메는 ‘자르치우트 아당칸’씨족의 소년이었다. 테무진의 인생을 다룬 많은 픽션, 논픽션들이 ‘자르치우트’를 젤메 아버지의 이름이라고 오인하고 있다. 자르치우트는 씨족 이름이다. 자르치우트족은 몽골족의 드릴루킨으로써, 오래전 몽골족에게 정복당하고 약탈당한 사람들의 후손이다. 한 번 당한 이후로 계속 몽골족의 손아귀에 있었다. 젤메 집안의 계급은 정말 낮아서, 이 집안 사람들은 목동노릇도 하지 못했다. 젤메의 아버지는 대장장이였다. 초원에선 전사도 목동도 아닌 이런 사람들이 무척 무시받으면서 살았다(덧붙이자면 당시 초원의 대장장이는 다른 문화권에 비해 기술이 형편없었다.).

 

테무진이 타이치우드족에 붙잡혀 있을 때 도와주었던 소르칸 시라 같은 사람은 비록 드릴루킨이지만, 자신의 게르와 가축 등의 재산을 갖고 버젓이 가장 노릇을 할 수 있었다. 그에 반해 젤메는 사유재산에 해당하는 집안 노비였다. 원래 젤메는 테무진이 태어났을 무렵, 아버지가 예수게이에게 바친 갓난아기였다. 아마 노예 소유권자나 노예 씨족에게나, 일종의 ‘할당량’이 있었던 모양이다.

 

젤메가 어디서 성장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때부터는 확실히 테무진 가족의 일원이 된다. 사실 테무진 가족은 몽골족에게 버림받은 외로운 가족이었다. 이런 가족에게까지 신의를 지킬 필요는 없었다. 그럼에도 젤메는 자신의 의무를 다하러 왔다. 테무진은 이 사실에 매우 고마워했을 것이다. 게다가 무려 사지 멀쩡한, 다 큰 남자다. 보르추에 이어 든든한 인적자산이 한 명 더 생긴 것이다.

 



테무진은 젤메를 노예로 대하지 않았다. 테무진 자신도 타이치우드족에 붙잡혀서 포로이자 노예인 생활을 한 적이 있다. 그는 번득이는 재치와 새로운 개념을 창출해내는 천재성은 결코 없었다. 그러나 남들보다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장점 하나를 굳게 붙잡고 있었다. 바로 <직접 경험한 것을 잊지 않는 습관>이다.

 

타이치우드족은 형제지간이지만 테무진을 괴롭혔다. 반면 아무 상관도 없는 소르칸 시라 가족은 그를 구원해주었다. 테무진에겐 계급이나 출신이 별 의미가 없었다. 보르추는 부잣집 아들이고 젤메는 노예출신이지만, 둘 다 평등한 동료사이가 된다. 테무진은 평소엔 두 사람을 친구로 대했다. 젤메는 보르추와 마찬가지로, 훗날 세계 최고의 권력자 중 하나가 된다.

 

어째 상황이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도 생기고 든든한 동료들도 생기고, 동생들도 자라고 있고… 테무진은 이대로 가난하지만 행복한 목동이 되어 평생 살기만 하면 되었다.

 


아내가 생겼어요.JPG

 

그러나 긴 고생끝에 가까스로 찾은 행복은 곧 처참히 부서지고 만다.  

 

 

(다음편 ‘아내가 결혼했다’에서 계속)


원본 위치 <http://www.ddanzi.com/blog/archives/32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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