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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 강의

테무진to the칸(4) 살인의 추억

by 속 아몬드 2013. 10. 28.

테무진to the칸(4) 살인의 추억


2011.02.08.화요일

필독


 

intro

 

이제는 초원의 환경과 문화, 이야기의 배경상황들을 반복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임계점을 지났다. 지난 기사 안 봤으면 얼릉 텨가서 보고 오시기 바란다. 이 시리즈는 1편부터 순서대로 보지 않음 안 된다.

 

 

1

 

(전편에 이어)헐룬은 아이들을 기어이 키워냈다. 사람은 극도로 절망적인 상황을 맞으면 자포자기하거나, 아니면 완전히 거꾸로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한다. 헐룬은 후자였다. 다른 초원 아이들이 모전(양털 펠트) 벽으로 두른 따뜻한 게르에서 양, 소, 야크, 염소, 낙타, 말, 사냥한 사슴으로 만든 바베큐와 고깃국, 가축의 젖과 신선한 동물의 피를 먹을때 테무진과 형제들은 웬갖 잡풀과 오논강의 물을 먹으며 성장했다.




가난과 굶주림에 찌든 열한 살의 어느날, 테무진은 우연히 오논 강변에서 ‘자무카’라는 소년을 만나게 된다. 자무카는 유서깊은 ’자다란’씨족의 아이였다. 마침 자다란 씨족이 오논 강변에서 야영을 하고 있었다. 유목민들은 일년에 2~4번 야영지를 옮긴다. 성산 부르칸 칼둔과 거기서 시작되는 세 개의 강-오논 강, 케를렌 강, 툴라 강-은 몽골족의 발원지다. 몽골족의 한 지파인 자다란 씨족도 그곳에서 자주 야영하게 마련이다.

 

자무카는 테무진보다 몇 살, 아마도 2~3살 많았다. 하지만 또래를 만나기 어려운 초원에서 그 정도는 동년배로 통한다. 두 소년은 금세 친해졌고, 그해 겨울에 얼어붙은 오논 강 위를 지치며 놀았다. 몽골 사람들은 옛날부터 짐승의 뼈로 만든 스케이트를 타고 얼음 위를 이동했다. 베스트프랜드가 된 둘은 양과 노루의 복사뼈를 주고받으며 우애를 다졌다(이 선물에 대해선 1편에 설명을 해 놓았다.).

 


몽골 아이들의 대표적 장난감인 복사뼈

 

가난한 유목민 아이들이라고 해서, 깨벗고 뛰어다니며 개구리나 잡아먹고 논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몽골의 전통 놀이는 매우 다양하고 정교하다. 몽골 아이들은 짐승의 복사뼈를 일종의 주사위로 쓰면서 놀았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큐빅 주사위처럼 <6면 중 1면>이 아니라 <4면 중 1면>이 나오게 되어 있다. 대체로 말, 낙타, 양, 염소가 각각의 면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말은 멋지고 빠른 동물이지만 낙타처럼 훌륭한 짐꾼은 아니다. 반면 양의 털은 몽골인의 생활에 중요한 자원이다. 이처럼 각 동물의 쓰임과 가치가 다르다. 주사위의 네 동물중 어떤 동물이 나오느냐에 따라 특정 상황에서 게임의 향방이 바뀐다. 복사뼈를 많이 가진 2인 이상이 모이면, 형태와 룰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게임은 얼마든지 복잡하고 다양해진다.

 


복사뼈로 하는 몽골식 주사위놀이를 ‘샤가이’라고 한다.

 


테무진과 자무카는 피로 맺은 의형제, 즉 ’안다’가 되었다. 얼핏 보면 애들이 장난감 주고받으면서 어른 흉내 낸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소년은 진지했다.

 

자다란 씨족이 야영지를 옮기면서 두 친구는 헤어지지만, 테무진이 12살이 되는 다음해 봄에 또다시 만나게 된다. 테무진과 자무카는 두 번째 안다 의식을 맺었다. 형편에 따라 헤어지고 만나는 사이라 우정이 더욱 고팠을 수도 있었으리라. 이번에는 좀 더 어른답게 화살을 주고받았다.

 

자다란 씨족은 ‘흰 뼈’로 통했다. 테무진보다 훨씬 부자였던 자무카는 아주 멋진 화살을 주었다. 소리나는 화살, 즉 ‘효시(嚆矢)’였다.

 


몽골 사람들은 활의 민족답게 상황에 따라 수십 가지의 화살을 사용했는데, 그 중 하나가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화살인 ‘효시’다. 보다시피 구멍이 뚫려 있는데, 호루라기나 피리와 같은 내부구조를 가지고 있다. 화살을 쏘면 바람이 숨의 역할을 하면서 그 화살만의 독특한 소리를 낸다. 효시는 군사작전시 암호로 쓰였으며, 사냥이나 약탈을 나선 전사들끼리 자신들만 아는 소리로 은밀히 교신할 때도 사용했다. 아마 두 친구는 자무카가 선물한 효시로 서로의 위치를 알려주며 유대감을 다졌을 것이다.

 

위 사진에서 알 수 있듯 효시는 아주 비싼 화살이다. 화살대로 쓰이는 나무와 촉에 들어가는 금속, 호각부위를 따로 제작해야 한다. 효시는 일회용품이 아니므로 내구성도 중요하다. 좋은 재료와 정교한 기술, 노가다가 필요한 물건이다.  

 

반면 가난한 테무진은 겨우 나무를 깎아 만든 화살을 주었다. 화살촉도 나무로 되어있었다. 기껏해야 새 깃털을 달아주는 게 전부였을 것이다. 이런 화살은 연습용이나 새잡이용으로 쓸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어차피 물건을 거래하는 사이는 아니었다. 자무카는 테무진의 초라한 선물을 기꺼이 받았다.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은 서로의 피를 마시며 의식을 거행했다. 몽골인들에게 피는 곧 영혼. 두 사람은 서로의 영혼을 삼켜 일심동체가 된 것이다.

 

또한 무엇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두 어린 안다는 ‘소화되지 않는 음식’을 먹었다. 어쩌면 피를 말하는 것일수도 있다. 영혼은 소화되지 않는 거니까. 혹은 돌이나 쇳조각, 짐승의 뼈 등 정말 물리적으로 소화되지 않는 물건이었을 수도 있다. 그게 무엇이든, 우정의 상징을 몸 속에 영원히 간직하기 위한 것이었음은 분명하다.

 

자무카는 어린 시절의 테무진에게, 친가족 외에 호의의 신뢰를 보여준 유일한 친구다. 또한 테무진 평생을 통틀어, 안다를 맺은 유일한 인물이다. 고통스러운 성장기를 견디뎐 테무진에게 자무카의 존재가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지는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무엇이 두 소년들로 하여금 두번씩이나 안다를 맺게 했을까? 둘은 서로의 뭐가 그렇게 좋았을까? 그건 나뿐만 아니라, 현재를 사는 누구도 모른다. 다만 이런 생각은 든다. 아이들은 서로 비슷할수록 가까워진다. 반면 어른들은 성격과 기질이 비슷한 사람들일수록 경쟁하고 증오한다.

 

테무진과 자무카는 비슷한 인간이었다. 둘은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났을 때 한 번 힘을 합쳤다가, 이후 철천지 원수가 되어 약 20년 동안 투쟁한다. 마침내 승자와 패자가 갈려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어졌을 때 극적으로 화해하게 된다.

 

 

2

 

헐룬과 소치겔의 아이들이 점점 자라자 슬슬 수렵과 채집에 나설수 있게 되었다. 헐룬(과 소치겔)의 부담이 준 것이다. 그래봐야 애덜이 할 수 있는 ’수렵’은 낚시가 전부였다. 사냥단을 조직해 사슴과 야생마를 놓고 늑대무리와 레드오션 경쟁하기엔 나이도 어렸고 머릿수도 적었다. 활이라도 쏠 줄 아는 애들은 헐룬의 자식들인 테무진과 카사르, 소치겔의 두 아들 벡테르와 벨구테이 네 명 뿐이었으니.

 

당연한 말이겠지만 테무진과 카사르는 자기들끼리 친했고 벡테르와 벨구테이는 같은 편이었다. 머리에 피가 마르기 시작하니까 같은 엄마 자식끼리 라인이 갈린 게지… 이 2vs2 그룹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사춘기가 되어서부터는 줄곧 다퉜나보다. 첫째라서 힘도 세고 덩치도 제일 좋은 벡테르가 싸움에서 가장 유리했다.

 

하루는 테무진과 카사르가 ’크돌리’ 화살로 작은 새 한 마리를 잡았다. 크돌리란 우리말로 ‘고두리살’을 뜻하는데, 고두리살을 말 그대로 뜻풀이하면 끝이 뭉툭해서 살 속에 박히지 않는 화살을 말한다. 원래는 작은 새를 잡을 때 쓰는 화살이다. 일반적인 화살로 작은 새를 잡으면 뼈와 살이 뭉텅 헤지고 패여서 먹을 것도 별로 없을 터. 그러니 고두리살로 퍽 하고 ‘쳐서’ 잡는 것이다(나중에는 모든 새잡이용 화살을 통칭하는 말이 되었다.).

 

동생 물건 뺏는 형, 지구에 3억 명은 될 거다. 백테르도 평범한 형답게 테무진의 새를 빼앗아갔다. 테무진의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그 다음날, 테무진, 카사르, 벡테르, 벨구테이 넷이서 오논강변에 나란히 앉아 낚시를 하다가 물고기 하나가 테무진과 카사르의 낚싯대에 걸려들었다. 벡테르 형제는 그 생선도 빼앗아갔다.

 

<몽골비사>에는 분명히 테무진과 형제들이 낚시를 해서 “자신들의 어머니를 봉양했다.”고 나와 있다. 극한의 생존을 위해 수년째 협동하던 가족이다. 벡테르와 벨구테이가, 빼앗은 생선을 지들끼리만 먹진 않았을 것이다. 아마 친모 소치겔과 헐룬한테 갖고가서 <우리가 낚았어요~> 했겠지.

 

뿔이 난 테무진과 카사르는 지구에 사는 3억명의 동생들처럼 헐룬에게 달려가서 일러바쳤다. 그러나 헐룬은 벡테르를 두둔하며 외려 테무진과 카사르를 혼냈다.

 

“그만들 해라. 형제끼리 왜 싸우느냐? 우리한테는 그림자말고는 친구가 없고, 꼬리말고는 채찍이 없다(이 문장은 고립무원의 상태를 표현하는 중세 몽골의 관용어구다.). 우리끼리 싸워서야 우리를 버리고 떠난 타이치우드 친적들과의 한을 풀 수 있겠느냐?”

 

뭐…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헐룬은 몽골족 신화의 주인공 이야기를 하며 테무진과 카사르를 훈계한다. 바로 모든 몽골족의 상징적 어머니로 통하는 ‘알란’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의 플롯은 독자열분들도 많이 들어봤을 거다.

 



: 알란은 키가 3미터가 넘는 신성한 여자였는데, 얼굴은 얼마나 이쁜지, 또 몸매는 얼마나 글뤠뭐뤄쓰한지… 여튼 알란은 여차저차해서 남편을 만나 두 아이를 낳는데 그만 남편이 죽어버리고 만다. 그런데 그 후에 “남편도 없이” 애를 셋이나 더 낳는다. 으음… 대체 누구의 아이일까?

 

알란의 남편은 생전에, 사슴을 사냥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굶어죽기 일보직전의 가난뱅이를 만난 적이 있다. 그 사람이 하도 배고파서 자기 아들을 팔테니 고기 좀 달라고 하기에, 사슴 뒷다리와 아이를 맞바꾼 적이 있다. 이 아이를 집안에서 하인으로 부려먹었지만 그래도 아들 대접을 해 줬다. 즉 양자인 것이다.

 

알란의 두 ‘적통’ 자식들이 바보가 아닌 한, 세 동생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양자로 들어온 자기들의 의붓형제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아아 어머니 어떻게 이럴 수 있나요… 하고  따지자 알란은 화살을 가져와서 형제 다섯에게 하나씩 꺾어보라고 한다. 화살은 당연이 똥강똥강 꺾였다. 그 다음에는 화살 다섯 대를 돌아가면서 한 번에 꺾어보라고 한다. 독자열분덜, 자라면서 동화책 봤으면 알 거다. 꺾일 리가 있나? 이어 알란 아줌마가 미리 준비해 놓은 결론이 나온다.

 

“봐라! 너희 다섯 형제는 이 화살처럼 똘똘 뭉쳐야 꺾이지 않고 살 수 있는게다. 반목할 생각 하지 말고 서로 의지하며 살아라. 아버지가 누군지 따지면서 싸우지들 말고… 어차피 늬덜, 다 내 배에서 나오지 않았니?”

 

(주의할 것은 이 이야기가 몽골을 원류로 하는 구전이라기보다는,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는 흔한 이야기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헐룬 曰,

 

“싸우지들 말고 화목하게 지내렴.”

 

 

3

 

현실은 이야기만큼 아름답지 않은 법이다. 테무진은 헐룬의 훈계를 듣지 않았다. 대신 반항의 뜻으로 게르의 모전 벽을 손으로 제끼며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곧바로 벡테르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살인… 그것도 존속살인이다. 혈통이 중요시되는 유목민 사회에서 친형제를 죽인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전편에서 이야기했다시피 초원에선 ‘평판’이 보통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럼에도 테무진은 형-비로 배다른 형이지만-을 죽이려고 마음먹은 거다. 약을 잘못 먹은 걸까? 아니면 굶다보니 정신줄이 소풍을 나간 걸까?

 

소설이나 영화 등 테무진의 일생을 다룬 스토리들을 보면 벡테르를 최대한 나쁘게 묘사하곤 한다. 테무진의 살인행위를 변호하려면 어쩔 수 없다. 그렇지만 벡테르가 한 일이라고는 생선과 작은 새를 빼앗은 게 전부였다. 별로 좋은 형은 아니었던 모양이지만, 결코 죽어도 될 만한 사유가 되진 못한다.

 

답은 벡테르의 악행이 아니라 헐룬의 태도에 있다. 벡테르는 죽은 남편의 자식이지만, 헐룬과는 생물학적으로 피가 섞이지 않았다. 몽골 유목민들에게는 충분히 결혼할 수 있는 사이다. 알란 고아는 남편이 죽고 나서 양자와 육체관계를 가지고 아이를 낳았다. 헐룬이 알란 고아의 이야기를 하며 테무진과 카사르를 훈계한 이유는 분명하다. 벡테르와 재혼하겠다는 거다.

 

테무진의 입장에서는, 가뜩이나 사이가 안 좋은 배다른 형이 가문의 가장이자 자신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싫을 수밖에 없다. 헐룬도 뭐 좋아서 그런 결정을 내린 건 아니었을 거다. 그녀는 예수게이의 본부인이었다. 벡테르를 남편으로 맞으면, 남편의 첩에 불과했던 소치겔은 지신의 시어머니가 된다. 그러나 당시 상황을 고려했을 때, 헐룬의 계획은 무척 합리적이다.

 

헐룬의 가족에게 ‘먹고사니즘’보다 더 중요한 이슈는 없었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낚시도 하고 새도 잡는 등, 비로소 제 몫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극한의 생존을 하고 있던 가족이다. 이럴 때는 가족에 속해 있는 ‘노동력’을 1人분이라도 묶어놓는 놓는 게 상책이다. 벡테르는 나이도 가장 많았고, 따라서 다른 형제들보다 집밖에서 먹을거리를 주워올 능력도 개중에 제일 나았다.

 

헐룬이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는 벡테르가 가족 구성원에서 떨어져나가는 게 될 수밖에 없다. 생전의 남편 예수게이처럼 세력을 모으는 ‘보스’의 조직원이 되거나, 남의 집에 데릴사위로 들어가거나, 혹은 남편처럼 어디서 불쌍한 여자를 납치해 결혼하거나. 그렇게 독립을 하면 헐룬 가족은 막대한 ‘인적 자산’을 잃게 된다. 

 


 

그러나 테무진에겐… 감정적으로도 싫었겠지만, 정치적으로도 용납할 수 없었다. 어머니 헐룬은 아버지의 정실 부인이었고, 그래서 지금까지 테무진은 예수게이의 후계자였다. 가난한 평민이었을지언정 원칙적으로는 카불 칸의 직계손이었고, 운이 좋아서 살아남아 장성한다면 예수게이의 부하들에게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라며 충성을 요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벡테르의 양아들이 되면 이러한 자신의 ‘배경’을 단번에 잃어버리게 된다.

 

하지만 과연 그때 그 시절의 테무진이 그런 정치적인 생각을 했을까. 뭐,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 애다. 요즘으로 치면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중학생 정도 되는 나이였다. 이렇게 어릴 때 형을 죽이기로 결심한 거다. 즉흥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애들은 찰리의 초콜릿공장에서 평생 살고싶기도 하지만 어른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한 취향을 드러낼 때도 있으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테무진의 살인은 ‘계획살인’이었다. 그는 결코 멱살잡이를 하다가 ‘우연히’ 죽어있는 상대를 발견하거나, 약한 아이를 숨이 끊어질때까지 실컷 때려놓고 나중에 경찰서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 ”설마 죽을 줄은 몰랐어여…장난이었는데…”하고 울먹이는 중학교 일진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아니 그녀석의 목표는 정확하면서도 ‘효율적인’ 살인이었다.

 

게르에서 나온 테무진은 곧바로 카사르와 공모한다. 공모의 내용은 싸움이나 대결이 아니라 ‘사냥’이었다.늑대(꼭 몽골늑대만이 아니라 코요테나 리카온도 마찬가지다.)가 먹잇감을 사냥하는 모습을 보면, 야생의 추적과 탈주가 결코 일직선의 속도싸움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먼저 초식동물 무리를 동요시킨다. 그 과정에서 점찍은 초식동물을 무리에서 떼어낸다. 이윽고 ‘추격대’가 약속된 루트를 따라 먹잇감을 추격한다. 그러는 동안 ’매복대’는 추격루트를 우회해 사냥감을 기다린다. 추격대가 적당한 지점으로 사냥감을 모는 데 성공하면, 매복대가 사냥감에 1차 타격을 가한다. 그러는 동안 뒤쫓아온 추격대가 먹잇감에 달라붙는다.

 

늑대는 몽골초원의 대표적인 토템이다. 몽골 남자들은 실제로 늑대의 생존전략과 지혜, 끈기(개과동물의 근육은 지구력이 엄청나다.)를 존경했다. 몽골 전사들은 가젤이나 사슴을 사냥할 때 늑대들의 행동패턴을 다양하게 모방했다. (자기네들은 ‘잿빛 이리의 후손’이라는 몽골족의 신화, 그리고 훗날 늑대의 사냥법을 연상케 하는 테무진의 군사전술 때문에 테무진을 다룬 현대의 많은 이야기들은 늑대와 테무진을 어떻게든 연결시키려고 한다.)

 

테무진과 카사르도 그랬다. ‘벡테르 살인’은 테무진의 영악함과 장점이 모두 드러난 사건이다. 어차피 힘으로는 안 되기 때문에, 두 형제는 활을 사용하기로 했다. 마침 벡테르는 가족들의 말을 지키며 작은 언덕에 한가로이 앉아 있었다. 실패할 확률을 최소화하기 위해 둘은 전략적으로 움직였다. 활시위를 당긴 채 각기 다른 방향으로 소리없이 접근한 것이다.

 

벡테르가 위험을 감지했을 때, 이미 두 배다른 형제는 자신을 앞뒤로 포위한 채 정조준하고 있었다. 벡테르도 바보는 아니어서, 이 상황이 형제들간에 으례 벌어지는 쌈박질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의 마지막 모습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의연했다. 그는 큰형답게, 잠깐 훈계를 한다.

 

“이게 무슨 짓이냐? 함께 힘을 합쳐 타이치우드 형제들에게 본때를 보여줄 생각은 하지 않고…”

 

그리고 살려달라고 비는 대신 친동생 벨구테이의 안전을 부탁한다. 어차피 죽은 목숨이라는 걸, 동생들의 눈빛만 봐도 알았을 것이다.

 

“내 대(예수게이-소치겔의 가계)가 끊어지지 않게, 벨구테이는 죽이지 말아다오.”

 

테무진과 카사르는 대답 대신 양쪽에서 화살을 쏘았다. 벡테르는 즉사했다.

 


방금 형을 죽였어요.

 

 

4

 

게르에 들어온 테무진과 카사르의 얼굴을 보고, 헐룬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차렸다. 살인을 저지른 자의 얼굴은 그 전과 다른 법이다. 게다가 애들이다. 아무리 계획적으로 저지른 일이라 할지라도 얼이 빠져 있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어머니가, 자기 아들들의 표정을 읽지 못하겠는가.

 

헐룬은 분노와 절망에 휩싸여 저주를 퍼붓는다.

 

“제 형제를 죽인 놈들! 테무진 네 이놈, 내 뜨거운 자궁을 박차고 나올 때 네놈은 손에 검은 핏덩어리를 쥐고 태어났지…”

 

어쩐지 불길하더라니, 결국 존속살인자가 될 놈이었다는 뜻의 저주다.

 

“… 사나운 개처럼, 표범처럼, 제 새끼를 무는 낙타처럼, 새끼를 잡아먹는 미친 원앙처럼, 길들일 수 없는 맹수처럼… 너희는 형제를 죽였다. 이제 어떻게 살자고 네놈들이 이런 짓을 저질렀느냐….!” 

 

헐룬은 벡테르와 재혼하려는 계획이 틀어져서 화가 난 게 아니었다. 이렇게 된 마당에 그딴 건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아들들이 살인죄를 저질렀는데 그 충격이 얼마나 컸겠는가?

 

테무진의 살인은 정치적이었지만, 그건 한 집안 내의 정치에 불과했다. 반면 아직 20대임에도 산전수전 다 겪은 헐룬은 ‘초원 단위’의 정치를 생각할 줄 알았다. 타이치우드족과 아버지의 옛 부하들에게 버림받은 테무진 가족은 이제껏 선량한 피해자였다. 도움을 준 사람들도 없었지만, 해코지를 한 이들도 없었다. 폭력을 행사할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테무진과 그의 가족은 범죄자였다. 얼마든지, 무기를 든 성인 남자들의 먹잇감이 될 수 있었다. 헐룬의 말대로 ‘앞으로 어떻게 살려고 그러느냐…’, 이제 이 가족은 정말 큰일났다.

 

헐룬의 예감은 적중했다. 소문은 금방 퍼졌다. 테무진과 카사르가 벡테르의 시체를 그냥 밖에서 썩게 내버려둔 것도 소문이 빨리 퍼지는 데 한 몫을 했다. 부르칸 칼둔 기슭과 오논, 케를렌, 툴라 강, 그리고 시베리아 삼림이 만나는 지역에는 자잘한 군소부족, 씨족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을 통해 소식이 퍼져나갔을 것이다.

 

타이치우드족의 뚱뚱이 칸 타르쿠타이는 속보를 접하자 마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수년 전 제삿날… 암바가이 칸의 늙은 미망인들의 억지 연극으로 간신히 판을 만들긴 했지만, 그래도 예수게이의 사람들을 빼앗아 헐룬 가족을 굶어죽게 내버려둔 것은 치사한 행동이었다. 이 사건은 분명히 타르구타이와 타이치우드족의 평판을 크게 떨어뜨렸을 것이다.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예수게이의 후계자가 죄를 저질렀다. 이런 범죄는 보통 혈통집단, 그러니까 부족이나 씨족 내에서 처리하는 게 상식이었다. 타이치우드는 테무진의 가까운 친척들이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면 뚱뚱이 칸과 타이치우드족은 정치적, 도덕적 권위를 완전히 회복할 수 있었다.

 

게다가 타르쿠타이는 테무진 가족의 끈질긴 생명력에 무척 당황하고 있었다. 아니 저것들이 왜 안 죽는 거야… 저러다 다들 멀쩡히 장성하면 내 골치를 엄청 썩이겠지? 테무진의 존속살인은 그들을 지근지근 밟아줄 좋은 핑계였다.


 

“앗쭈, 이 어린 것들이 다 자랐다 이거지? 제 형도 죽이고 말야…”



타르쿠타이는 즉시 부하들을 소집해 오논 강변의 헐룬네 게르를 습격했다. 사태를 파악한 테무진 가족은 얼른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자가 셋이었다. 헐룬, 소치겔 말고도 언제부터인가 함께 살게 된 ‘코아그친’이라는 노파가 있었다. 자식도 가족도 없이 늙은 코아그친은 집안일을 돌보는 하인이었을 것이다. 카쥰, 테무게, 테물린은 아직 너무 어렸다. 뻥 뚫린 초원이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봐야, 뻥 뚫린 초원에서 예비마를 끌고 따라오는 전사들을 따돌리기란 불가능했다.

 

그래서 일가족은 몸을 숨길 수 있는 산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타이치우드 전사들에게 곧장 뒤를 밟히고 말았다. 적은 숫자로 다수와 싸울 땐 좁은 길목을 지키는 게 최선이다. 식구들은 한두 사람만 통과할 수 있는 숲속의 좁은 길목을 만나자 즉시 전투준비를 했다. 힘이 좋은 벨구테이는 근처의 나무를 꺾어 바리케이트를 만들었다. 한두 사람씩하고만 싸울 수 있는 ‘판’을 만든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남자들이 아직 어리다. 힘으로 싸울 수는 없다. 하지만 활 대 활이라면 대적이 가능하다. 카사르는 활솜씨도 훌륭한 데다가, 타고난 ‘등빨’이 좋아 활시위를 많이 당길 수 있어 사정거리도 길었다. 아마 헐룬의 머리에서 나온 임기응변일 것이다. 이 아줌마, 보면 볼수록 대단하다.

 


벨구테이와 카사르는 어린 카쥰과 테무게, 테물린 그리고 두 어머니와 코아그친 할머니를 뒤로 숨겨놓았다. 두 동생들에 비해 싸움에 재능이 없어 딱히 도움될 게 없는데다가, 적들의 목표물었던 테무진도 앞으로 나설 수 없었다.

 

벨구테이는 사랑하는 친형을 잃은 직후였다. 그럼에도 테무진과 다른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우리 눈에는 이상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헐룬네 가족은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운명공동체였다. 어차피 형은 죽었다. 슬픈 건 슬픈 거고, 가장 나이 많은 형제인 테무진마저 빼앗길 순 없는 게 벨구테이의 입장이었다. 지금은 테무진이 집안의 가장이자 예수게이의 후계자였다. 가족의 미래가 그에게 달려있었다.

 

무엇보다 타이치우드라는 공동의 적이 눈앞에 있었다. 절체절명의 위기가 화해의 절차를 대신했던 걸까? 어쨌든 테무진은 동생은 죽이지 말아달라는 벡테르의 유언을 충실히 지켰다. 마치 벡테르 살인사건이 없었던 일이라는 듯, 이후 테무진과 벨구테이는 형제이자 동료로서 변함없는 신뢰를 유지하며 살아간다.

 

 

5

 

테무진 가족의 작전은 성공했다. 카사르는 타이치우드 전사들과 팽팽하게 싸울 수 있었다. 타이치우드 전사들의 입장에서는 울화통이 터졌을 것이다. 남자애 하나를 제압하지 못하고 있다니…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발이 묶여있을 순 없었다. 이윽고 타이치우드 전사 하나가 소리쳤다.

 

“카사르! 네 형을 넘겨라. 어차피 우린 다른 사람들한테는 관심없다. 테무진만 넘기면 모든 상황은 끝난다!”

 

역시 형이 목표였다. 어차피 버티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카사르는 테무진에게 어서 말을 타고 도망가라고 했다. 테무진은 말 한 마리에 의지해 더 높은 고지의 숲으로 튀었다. 그 모습을 본 타이치우드 전사들은 상대하기 영 만만찮은 헐룬네 식구들을 포기하고 테무진을 추격했다.

 

테무진은 빽빽한 수풀지대에 짱박혔다. 넓은 숲을 일일이 수색하기란 불가능했다. 타이치우드족은 어쩔 수 없이 숲으로 들어가는 길목을 지키며 테무진이 겨나오기를 기다렸다. 배고파지면 나오겠지. 숲속에 먹을 게 뭐가 있다고… 지가 별 수 있겠어?

 

숨어있는 테무진을 찾아보자.


 

테무진이 어떻게 자랐던가? 그는 이미 배고픔 참기의 달인이었다. 테무진은 풀을 뜯어먹으며 무려 9일을 버텼다. 그러나 몸이 견딜 수 있는 한계란 게 있는 법이다. 테무진은 타이치우드 전사들이 이제는 물러갔기를 바라며 숲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던 타이치우드 전사들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타르구타이는 테무진에게 나무널빤지로 만든 칼을 씌워 타이치우드족의 야영지로 끌고갔다.

 

 

위 사진에는 칼이 목에만 씌여 있다. 그러나 사료에 따르면 테무진은 목 뿐 아니라 양 팔도 구속되어 있었다. 타르구타이는 끝까지 칼을 벗겨주지 않았다. 따라서 테무진은 혼자서는 밥을 먹는 건 물론이고 일상생활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타르쿠타이는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테무진을 먹이고 재우라고 했다.  

 

밥술은 얻어먹었겠지만, 사실상 조리돌림의 무한반복이나 다름없었다. 타이치우드족 사람들은 테무진을 경멸했으며, 아마도 상당히 괴롭혔을 것이다. 테무진에겐 분초가 고통이었다. 교재를 가득 넣은 가방을 멘 채 24시간 365일을 지낸다고 생각해보라. 상상할 수 없이 괴로울 것이다. 하물며 칼을 쓰고 사는 나날은 어땠겠는가. 계속해서 이렇게 지내다가는 칼의 무게 때문에 제대로 성장하지도 못할 것이고, 뼈가 휘어 필시 반병신이 될 터였다. 어린 나이의 테무진이 정신적으로 붕괴할 가능성도 컸다.

 

타르구타이의 입장에서는, 괜시리 테무진을 죽일 필요가 없었다. 형제를 죽인 녀석을 벌한답시고 똑같이 형제(테무진의 키야트 혈족과 타이치우드족은 서로를 형제라고 불렀다.)를 죽이는 건 모순이다. 예수게이의 후계자인 테무진을 살려서 계속 벌주는 한, 타이치우드족은 보르지긴-키야트족을 ‘관리하는’ 귀족혈통이 된다. 옛날 예수게이 가족을 떠났던 사람들을 ‘테무진 괴롭히기’에 동참시킴으로써 죄의식을 무마하고(테무진이 더 나쁜놈이니까.) 내부의 결속을 다지기에도 좋다. 테무진이 얼마나 괴롭든, 정상적으로 성장을 하든 말든 그건 타르구타이의 알 바가 아니었고.

 

테무진은 특별히 눈에 띄는 재능도, 다른 사내아이들을 압도하는 마초적인 성향도 없는 아이였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무기가 있었으니, 바로 끈기였다. 그리고 낙천성, 즉 아무리 힘들고 괴로운 순간에도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믿는 성격이었다(테무진을 증오하는 중세~현대 서양 학자들은 이를 “악마적인 집요함”이라고 표현하지만, 그들의 입장을 아무리 고려해줘도 이건 너무 불공정한 표현이다.). 테무진은 청소년기에 맞은 인생의 암흑기를 이를 악물고 견뎠다. 천만다행으로 도와주는 사람도 있었다. 바로 ‘소르칸 시라’라는 사람이었다.

 

 

6

 

소르칸 시라는 ‘솔두스’씨족의 수령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꽤 귀족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몽골족의 조상은 ‘바보’ 보돈차르와 그의 아내다. 이들의 정액과 자궁에서 유래한 ‘순혈’ 몽골족을 ‘니르운’이라고 한다. 니르운은 ‘빛’, ‘순수함’을 뜻한다. 온 몽골족이 모두 니르운으로 구성된 건 아니다. ‘멀다’, ‘어둡다’는 뜻에서 ’드릴루킨’이라고 부르는 평민 이하의 백성들도 있다.

 

원래 니르운과 드릴루킨의 개념은 테무진과 그의 후손들이 유라시아대륙 최고의 권력자가 되면서 확고해진 개념이다. ’황금가족(알탄 오르도)’을 두 부류로 나눈 것이다. 이때쯤 되면 니르운이나 드릴루킨이나 전 세계에서 가장 고급스런 혈통이다. 특히 테무진의 외가인 올쿠누트족, 처가인 옹기라트족은 원칙상 니르운이 될 수 없는 드릴루킨이지만 웬만한 니르운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존경받았다(참고로 먼 훗날 중앙아시아를 제패하게 되는 정복왕 ‘티무르’는 몽골족 니르운인 ‘바를라스’ 씨족 출신이다.).

 

하지만 테무진이 카간(대칸)이 되기 전부터도 몽골족 사이에서 니르운과 드릴루킨은 확실히 구분되었다. 그래봐야 쬐그만 부족의 인간들이 누가 더 양반입네 따지는 거였지만 말이다. 

 

당시의 드릴루킨은 말하자면 이런 거다 :  보돈차르의 후손이지만 그의 정실부인인 ‘납치당한 숲 부족 여자’가 아닌 다른 여자가 낳은 자식의 후손인 ‘제레트’ 씨족. 알란 고아의 남편에게 사슴 뒷다리를 받고 아들을 팔아넘긴 남자의 후손인 우리얀카트(말 그대로 ‘오리앙카이’, 즉 ‘숲 속’ 핏줄이라는 뜻.)족. 보돈차르와 그의 형제들이 습격, 약탈하여 노예 혹은 하인으로 삼은 부족민들의 후손인 ‘자르치우트 아당칸’족. 몽골족 조상의 집에서 잡일을 했던 하인의 후손인 ‘말리크 바야트’족 등등.

 

솔두스족도 드릴루킨이었다. 타이치우드의 니르운 남자들이 전사, 사냥꾼이었던 반면 솔두스족은 목동 노릇을 했다. 가축도 치고, 양털도 깎고, 잡일도 하고… 소규모 부족이나 독립 씨족 등 작은 집단에서는 누구 할 것 없이 전사이자 사냥꾼이자 목동이자 잡일꾼이겠지만, 타이치우드족 정도의 규모에서는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다. 이런 집단의 하층민들은 상황이 급할 땐 <후속부대>가 되어 전투중 엘리트 전사들의 뒤를 받쳐주기도 했다. 하지만 계급차이는 확실했다.

 

 

학자들마다 ‘소르칸 시라’의 사회적 위치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한 씨족의 수령이었으므로 귀족에 해당한다는 이도 있고, ‘노예가족의 가장’이라는 결론도 있다(후자는 잭 웨더포드의 경우). 드릴루킨이므로 귀족은 확실히 아니었다. 하지만 드릴루킨도 등급만 낮을 뿐, 엄연히 몽골족의 일원이다. 노예는 결코 아니다(가정도 있고 자기 소유의 게르도 있고 재산도 있다.). 우리는 소르칸 시라를 ‘빈민촌 이장님’이나 조선시대 백정마을의 촌장 쯤으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여튼… 소르칸 시라 가족이 집집마다 돌림빵을 당하던 테무진을 맡을 차례였다. 소르칸 시라는 테무진이 무척 불쌍했나 보다. 게다가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딨겠는가? 마침 소르칸 시라에게는 세 자식이 있었으니, ‘칠라온’, ‘침바이’ 형제와 딸 ‘카다안’이었다. 세 자식은 테무진과 또래였다. 아이들은 테무진을 도와주자고 성화를 부렸다. 어린애들다운 반응이다.

 

소르칸 시라는 아이들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의 가족은 테무진의 칼을 벗겨주고 목에 생긴 상처를 치료해주었다. 카다안은 24시간 칼을 쓰고 고초를 당하느라 기진맥진해진 테무진을 돌봐주었다. 좋은 음식을 준 건 물론이다. 덕분에 테무진은 실로 오랜만에 배부르고 편하게 잘 수 있었다. 군생활 할 때를 생각해보면, 십수 시간 행군을 마치고 군장을 벗을 때 헬륨풍선처럼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잠시나마 칼의 무게와 괴롭힘, 굶주림에서 해방된 테무진은 얼마나 좋았을까.  

 

소르칸 시라 가족은 테무진이 자신들의 게르에 올 때마다 정성껏 돌봐주었다. 예수게이의 부하였던 사람들, 테무진의 친족들은 이런 친절을 베풀지 않았다.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일가족이 테무진의 유일한 ‘내 편’이었다. 포로생활이 계속될수록 테무진과 칠라온-침바이-카다안 삼남매는 친한 친구가 되었다. 테무진은 훗날 이 가족이 베풀어준 은혜를 결코 잊지 않는다.

 

하지만… 맘씨좋은 사람들이 한 가족쯤 있다고 해서 포로생활이 견딜만 한 건 아니었다. 소르칸 시라 가족과 떨어져 있을 땐 상상할 수 없는 고통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이러다가는 몸도 정신도 파괴되어버릴 게 분명했다. 죽느니만 못했다.  

 

다시 말해, 목숨을 건 도박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테무진은 탈출을 결심한다.

(다음편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에서 계속)


원본 위치 <http://www.ddanzi.com/blog/archives/32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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