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완소 Playlist 속 아몬드

유재하, 김현식 그리고 우리들의 '가리워진 길'

by 속 아몬드 2010. 2. 23.

노래 한 곡, 그 자체만으로 청자의 자유의지를 꺽어버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게 오롯이 음성이 가라는데로 따라 갈 수 밖에 없는... 그래서 아무 때나 함부로 듣기 힘든 노래가 있다.(필자에겐 김민기의 '봉우리' 같은 노래)

음과 가사의 깊이라기보다 뮤지션의 고뇌와 열정의 깊이, 아우라가 묻어날 때가 그렇다. 곡의 아우라가 발표 당시에 생성되는 건 아니다. 해가 지나면서 뮤지션의 신념이 자신의 음악과 어떤 합일점을 찾는지가 중요하다.



하지만 뮤지션과 음악을 분리해서 평가하는 게 일반적이며 뮤지션이 형편없는 인간이라도 음악이 좋다면 당연히 음악은 좋게 평가된다. 그렇다고 '아우라'가 생기진 않는다. 분명 노래가 가지는 아우라는 뮤지션 삶의 총체적 행보와 관련이 있다.

유재하의 '가리워진 길'이 가지는 아우라는 유재하, 김현식의 음악적 신념과 사랑 그리고 그들의 죽음이 얽혀있기 때문이겠다. '가리워진 길'은 유재하가 미국 시애틀로 떠난 여자친구를 무작정 찾아갔다가 정작 그녀는 보지못하고 그녀의 이모?에게 그녀의 닫힌 마음만 전해듣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처음으로 사랑의 쓴맛을 본 감수성 충만한 스물다섯 유재하가 쓴 곡이 '가리워진 길'입니다. 이 사랑의 상처는 유재하에게 음악을 그만두고 싶게 만들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유재하 만의 서정적인 발라드를 완성시켜주었습니다. 




유재하는 '가리워진 길'을 김현식에게 맡기고(상납하고?) 음악적 견해의 차이(김현식의 마초적 기질과 유재하의 섬세한 감성의 차이?)로 봄여름가을겨울을 탈퇴한다. 그래서 이 곡은 김현식의 목소리로 86년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 3집<비처럼 음악처럼>에 먼저 실리고 이후 87년 유재하의 데뷔 앨범<사랑하기 때문에>에 실린다.

김현식은 <비처럼 음악처럼>이 30만장 이상 팔리면서 공연과 녹음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지만 가족의 이민, 부인과의 별거, 후배들과의 음악적 견해의 차이로 외로움은 극에 달했다. 그러다 87년 11월 1일 한남대교 북단에서 친구 차에 동승했던 유재하가 교통사고로 죽는다. 음악적 재능을 본받으려했던 후배의 죽음... 김현식은 얼마나 허무했을까?

유재하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현식은 대마초 사건으로 구속된다. 이듬해 쓸쓸해진 4집을 들고 재기하면서부터 90년 11월 1일 간경화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음악에만 매진했다. 그의 날렵한 턱선이 사라질수록 그는 더욱 절실하게 목숨을 걸고 지독한 외로움과 싸우며 노래했다.

그가 엄인호, 이정선 등과 신촌부르스 활동을 할 때 병원에서 탈출해 환자복장으로 노래한 대구공연의 일화는 그에게 음악이 얼마나 절실했는지 가늠하게 해준다.


갑자기 '가리워진 길'이 듣고 싶어진 건 노대통령 서거 당일 덕수궁 앞 임시 분양소에 갔을 때였다. 추모객들과 이런저런 얘기하면서 답답하고 막막했다. 누군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선창했지만 필자는 '가리워진 길'을 부르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어딘가로 주문을 걸고 있었다. "그대여 힘이 돼 주오, 나에게 주어진 길 찾을 수 있도록..."

유재하와 김현식의 기일이 같다는 것, 둘이 '가리워진 길'을 공유했다는 것으로 우리는 유재하와 김현식을 같이 추억한다. 이 둘의 이야기를 현재 살아서 그들을 추억하는 엄인호, 김종진, 전태관, 박성식 등이 뭐라도 하나 만들었으면 좋겠다. 우리의 대중음악사가 가지고 있는 소중한 스토리가 점점 잊혀지는 것 같아 아쉽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