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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 강의

테무진 to the 칸(3) 아버지를 위한 나라는 없다

by 속 아몬드 2013. 9. 25.

    테무진to the칸(3) 아버지를 위한 나라는 없다


    2011.01.28.금요일 / 필독

     

     

     

    1

     

    테무진의 나이 아홉 살.

     

    1편에서 미리 설명했지만, 몽골의 남자아이들은 이 나이쯤 되면 아내와 처가가 정해지게 마련이다. 이때부터 정식 결혼식을 올릴 때까지 처가에서 데릴사위를 하게 된다.

     

    예수게이도 테무진을 데릴사위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정해진 처가가 없었다. 딱히, 소정의 계약이나 정략결혼을 결정할 만한 상대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처가를 ‘찾으러’ 여행을 가게 된다. 예수게이는 테무진과 함께 말을 타고 여행길에 오른다.

     

    예수게이는 좀 뻔뻔한 남자였나 보다. 그는 미녀가 많기로 소문난 올쿠누트족으로 떠났다. 그런데 시집오는 그에게 납치당해 강제결혼을 하면서 인생이 두루마리 휴지처럼 꼬였던, 테무진의 어머니 헐룬도 올쿠누트 족이었다. 헐룬과 함께 살아보니 역시 여자는 올쿠누트야~ 하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며느리도 올쿠누트 여자를 맞고 싶었겠지…

     

     



    어머 아버님~

     

     

    하지만 올쿠누트 족엔 헐룬의 가족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예수게이는 여행용품과 비상식량 외에는 별다른 것도 없이 혼사길을 떠났다. 예수게이는 부하도 많고 군사력도 있었지만 가난했다. 약탈한 물건들은 식량으로 바꾸기 바빴을 것이다. 보통 어린 아들을 사돈 집에 사위로 맡겨두고 올 때는 예물을 전달하는 관례였다. 부유하고 미녀 많은 올쿠누트 땅에 가서,

     

    “아 저는 일전에 올쿠누트 여자를 납치해 아내로 삼았던 예수게이인데요… 뭐 딱히 준비한 선물은 없지만 누가 며느리 좀 주시겠습니까?”

     

    하려고 한 거다. 어쩌면 자신의 이름값이 그쯤은 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가난한 깡패였지만 커레이트족의 옹 칸의 안다였고, 금나라의 지원을 받는 강성한 부족인 타타르와 심심하면 싸우면서도 멀쩡히 살아있는 사내였으니까.

     

    하지만 올쿠누트 족 땅에 가기도 전에 웬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몽골을 포함한 유목문명권에서는 나그네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 불문율에 가까운 관습이다. 도움을 청한 나그네에게 곳과 잠자리를 제공하는 .그리고 쉬었다 가라는 주인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는 . 두가지는 몽골초원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예의였다.

     

    인구가 적고 땅이 넓은 초원은 거주지(게르 야영지) 거주지가 멀리 떨어져 있다. 식량은 귀하고 물자는 적다. 어쩌나 마주친 게르 하나가 나그네를 쫓아내면, 사람은 목적지까지 가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다.

     



    이걸 쌩까고 지나간다고 생각해보면…

     

     

    초원에서는 걸어다닐 수 없다. 모든 거리가 말타기를 기준으로 설정되어 있다. 걸어서 헤매다가는 사람과 식량을 만나 굶어죽거나, 초원을 휘젓고 다니는 늑대무리의 식사감이 되기 십상이다. 지금 타고 있는, 딸랑 한마리 있는 말이 다쳤다고 생각해보라. 동서남북 사방엔 사람 그림자도 보인다… 이건 ‘죽음’에 가까운 상황이다(그래서 초원의 여행자들은 보통 타고 있는 외에 한마리 이상의 ‘예비마’를 끌고 다닌다.). 

     

    약탈과 폭력이 횡행하던 초원이었지만, ‘나그네 원칙’은 그나마 ‘사람사는 세상’의 최소조건이었다. 이 룰을 어기는 것은 매우 불명예스러운 일이다. 비슷한 이유로 ‘죽어가는 사람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는’ 관습도 있다. 불시에 사고를 당해 죽게 되었을 , 가족들은 말로 달려서 며칠 거리에 떨어져 있을 수도 있다. 친한 사람이든 아니든, 누군가 곁에 있다면 사람이 유언을 전달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유족들은 가족이 죽었는지도 모를 것이다. 

     

    심지어 칼을 들고 싸우는 적들끼리도 갑자기 인간적인 호의를 베푸는 일도 있다.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테무진에 관한 전설 중에 이런 얘기가 있다.

     

    : 타타르족이 예수게이 무리의 야영지를 습격해서 전투가 벌어졌다. 몽골과 타타르의 전사들이 난투를 벌이는 동안, 만삭이었던 헐룬의 양수가 터지고 아이가 나오려고 한다. 마침 모습을 목격한 타타르 전사가 잠시 싸움을 멈추고 아이-바로 테무진- 받아주었다. 나중에 테무진은 장성해 타타르족을 쓸어버리는데, 죽은 적들 중에 어머니 헐룬이 말했던, <너를 받아준 은인>의 인상착의와 일치하는 시신이 있었다. 그걸 보고 테무진은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한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 자체는 뻥이지만, 초원에서는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다.

     

    여하튼 예수게이에게 호의를 베풀어준 사람의 이름은 데이 세첸. ‘세첸’은 ‘현명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실명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이 붙여준 별칭이었을 것이다. 세첸은 칸과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칸은 최소 부족 이상의 규모를 이끄는 사람으로, 아무래도 군사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반면 세첸은 훨씬 일상적이면서, 마을 이장이나 장로같은 느낌이다.

     

    데이 세첸은 ‘옹기라트’ 씨족을 이끌고 있었다. 예수게이와 테무진이 방문한 곳은 옹기라트족의 캠프였던 것이다. 옹기라트족은 올쿠누트 부족에서 파생되어 나온 씨족으로, 두 집단은 가까운 친척 사이였다. 피는 못 속인다고, 옹기라트족에도 미녀가 많기로 유명했다. 하여간 예수게이는 데이 세첸을 만나게 되는데…

     

     

    2

     

    예수게이와 만난 데이 세첸은 부자(父子) 여행을 하는 이유를 묻는다.

     

    “누구를 만나러 오셨습니까?”

    “아 얘는 제 아들인데요… 아이 외가인 올쿠누트족에서 며느리를 얻으려고 가는 길입니다.”

     

    그러자 데이 세첸은 무슨 경쟁심이라도 생겼는지, ‘올쿠누트에 뒤지지 않는’ 옹기라트 여자들의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이 대목에서 옹기라트족의 독특한 생존전략이 드러난다.

     

    “우리는 이 나라(울루스) 저 나라 싸우고 다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백성들끼리 싸워봐야 뭐… 우린 외모가 뛰어난 딸들을 길러 다른 부족의 칸들에게 시집보내지요…”

     

    한마디로 우리 여자들은 죄다 칸과 결혼할 급은 된다, 이 말씀. 초원에서는 남자나 여자나 굳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다음의 대사는 꽤나 재밌다.

     

    “… 목영지는 우리 아들들이 돌보지요. 딸들은 예쁜 얼굴을 보여주는 게 일이구요. 허허~”

     

     



    양치느라 피곤하지? 자 여기 얼굴~ ♥

     

    칸의 아내 정도 되는 귀부인을 몽골어로 ’카톤’이라고 한다. 올쿠누트족과 옹기라트족은 ‘카톤 공장’쯤 됐던 모양이다. 아마 말은 예수게이의 기를 죽이기 위해서 말이 아니었을까? 혹여나 이동네에서 며느리감 넘보지 말라고 말이다.

     

    그러나 데이 세첸은 초원의 룰에 따라 예수게이와 테무진을 친절히 접대한다. 데이 세첸의 게르 안에는 그의 열살 딸이 있었다. 예수게이가 소녀를 보니 과연 올쿠누트족답게 예쁘기 그지없는게 아닌가. 저돌적인 예수게이는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바로 청혼을 한다. 아니 대체 믿고…

     



    시베리아 출신 화가 K. Novosadov가 그린 보르테  

     

    소녀의 이름은 ‘보르테’. 테무진보다 한 살이 많았다. 두세 살 많았으면 딱 좋았겠지만, 어쨌든 연상이니 관습대로인 셈이다. 테무진과 보르테는 하룻밤만에 벌써 서로를 마음에 들어하는 같았다. 그러면 얘기가 쉽게 풀린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딨겠는가? 하여간, 소년소녀의 아버지들 사이에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 우리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데이 세첸이 보르테를 아까워한 것만은 틀림없다. 이건 , 손님한테 하룻밤만에 딸을 뺏기게 됐으니.

     

    “여러번 (딸을 달라는) 부탁을 듣고 딸을 줘야 며느리(혹은 사돈) 귀한 줄 알지요. 몇 번 달라고 해서 바로 딸을 내주면 막 대하는 아니요?

     

    하지만 결국,

     

    “딸로 태어난 사람의 운명은 태어난 문전에서 늙지 않는 ( : 어차피 아들이 아니고 딸인 이상 언젠가는 남의 집에 영영 보내야 하는 팔자.).

     

    이라는 말을 하며, 결혼을 승낙한다. 번갯불에 콩구워먹듯 결혼을 결정한 예수게이는 테무진을 데릴사위로 맡겨두고(데릴사위제에 관해선 시리즈 1편을 보시라.) 가족이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 그러면서 첫째, 결혼예물로 예비마를 주었다. 줄 그거밖에 없었으니까. 둘째, 테무진은 개를 무서워하니까 개를 멀리 떨어뜨려달라고 특별히 부탁한다.

     

    늑대는 말할 것도 없고, 개는 초원에서 흔한 동물이다(참고로 우리나라의 풍산개와 진돗개, 일본의 아끼다견은 몽골견의 후손이다.). 키우는 개도 많고 들개도 흔하다. 

     

     



    몽골 늑대

     

     


    몽골 야생견(들개)

     

     

    몽골 쉽독(목양견)

     

    전형적인 몽골견. 진돗개, 아끼다견과 공통점이 보인다.

     

     

    제 또래 찾기가 힘든 초원에서 개는 아이들에게 최고의 친구다. 아버지가 사돈에게 신신당부할 정도로 개를 무서워하는 모습을 보면 확실히 테무진은, 다량의 남성호르몬을 보유하고 태어난 내추럴 본 히어로는 아니었다. , 확실히 ‘그런 쪽의’ 히어로는 아니었다. 테무진은 힘이 세지도 않았고 덩치가 크지도 않았고 자라면서 특별한 재능을 보인 분야도 없다.

     

    헐룬이 <테무진은 재능이 많다>고 에둘러 말하는 대목이 나오지만, 어떤 재능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진 않았다. 반면 두 살 어린 동생 카사르의 재능은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다. 카사르는 어려서부터 힘이 좋고 활을 쏘았다. 활솜씨는 초원의 남자에게 필수적인 능력이었다. 배다른 형제 벨구테이는 씨름꾼이었다(훗날 초원의 천하장사인 ‘부리’라는 남자에게 씨름도전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옹기라트족의 데릴사위가 테무진은 짧으면 며칠, 길면 1~2 동안 보르테와 소꿉장난같은 예부부부생활을 하게 된다. 옹기라트족의 게르는 고향집보다 살림살이도 많고, 좋은 먹을거리도 있는데다가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도 화려했을 테니, 테무진은 촌티를 팍팍 내며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테무진은 처갓집에서 적응할 시간도 없었다.

     

     

    3

     

    예수게이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 혼자 털레털레 돌아오려니 심심하기도 하고 외롭기도 했을 것이다. 배도 좀 고팠을 것이고… 그런데 저기 보니 웬 사람들이 뻑적지근하게 잔치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당연히 예수게이는 잔치판으로 말머리를 돌린다.

     

    “어이구 저도 숟가락 좀 얹읍시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다름아닌 예수게이의 공식 원수 타타르인들이 아닌가! 어쨌든 나그네를 잔치에 껴주는 것 또한 초원의 룰. 사실 예수게이가 그들이 타타르인들이란 걸 알고 들이댔는지, 아니면 잔치판 도중에 깨달았는지 우리는 도리가 없다. 사실 예수게이도 당황했을 것이다. 타타르족의 땅은 옹기라트족보다 동쪽에 있다. 북서쪽으로 이동하던 중에 잔치판을 만났으니, 타타르족의 잔치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집단사냥이나 약탈을 나와 크게 한 타타르 전사들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예수게이는 적의 무리 한가운데서 태연히 술과 고기를 얻어먹었다. 이는 역시 초원의 문화와 관련이 있다. 초원에는 문자도 없고(나중에 생기지만), 사람들도 당연히 문맹이다. 그러니 사람이 입으로 하는 ‘말’이 전부다. 역사는 구전으로 전달되며, 약속과 맹세가 법과 같은 효력을 지닌다. 구두계약을 지키지 않는 것은 인간으로 존중받기를 포기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이런 문화에서는 소문이 언론과 프로파간다의 역할을 한다. 초원에서는 ‘평판’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수준 이상으로 중요하다. 단지 “그놈 참 나쁜놈이네.”, “어, 그양반한테 그런 면이 있었군?”하는 정도가 아니다. 평판에 의해 중대한 정치적 결정이 내려지고 부족의 운명이 달라진다.

     

    그러니 타타르족 입장에서도 비록 적일지언정, 잔치의 손님을 죽여서 지덜 얼굴을 똥으로 화장할 순 없었다. 그래도 원수는 원수. 예수게이는 자신의 정체를 노출하는 실수를 저지르진 않았다. 하지만 어디 한두번 본 사이던가? 타타르족 전사 일부가 그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쉬잇! 저 새끼, 예수게이다!”

    “아 씨바 저 개노무시키…”

     

    예수게이를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 그러나 역시 손님에게 칼을 휘두를 수는 없는 일. 그래서 타타르족 전사들은 예수게이가 마시는 술(혹은 식사)에 몰래 독을 탔다.

     



    몽골의 전통주 ‘아이라크’를 만드는 모습

    (사진 – 론리플래닛)

     

    예수게이는 예수게이대로, 자연스럽게 자리를 떠야 했다. 그는 이미 예비마를 사돈에게 선물로 준 상태. 예비마는 스페어타이어의 개념도 있지만, 더 스펙타클한 용도도 있다. 사람을 태운 말은 그렇지 않은 말보다 당연히 더 느리고, 더 빨리 지친다. 타타르 전사들이 일인당 한두 마리의 예비마를 몰고 쫓아오면 반드시 잡힌다. 괜히 티를 내선 안 된다. 그래서, 자신이 독에 중독되었다는 사실을 잔치중에 알았는지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알았는지 확실치 않지만, 예수게이는 독이 음식을 죽기에 충분할 만큼 먹고 나서야 일어설 있었다.

     

     

    4

     

    예수게이는 3일 밤낮을 쉬지 않고 집으로 향했다. 몸상태가 갈수록 나빠진 그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죽기 직전의 상태였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부하가 누구인지부터 물었다. 마침 ‘차라카’라는 노인의 아들 ‘뭉릭’이 근처에 있었다. 예수게이의 유언은 급박하고 절절하다. 

     

    “뭉릭아! 내 애들은 아직 어린데… 테무진을 사돈댁에 데릴사위로 맡겨놓고 오다가 타타르 놈들한테 당하고 말았다. 어린 조카놈들과 과부 형수를 네가 보살펴다오…”

     

    여기서 잘 보살펴달라는 말은 곧 헐룬과 결혼하고 아이들을 양자로 들여달라는 이야기임이 분명하다. 척박하고 거친 초원에서 남편을 잃은 여자는 살아갈 방도가 없다. 여성과 아이들의 입장에서 재혼은 일종의 ‘복지’다. 그러니 예수게이에로서는 자신의 정실부인이 부하의 첩이 되어도 오히려 다행인 거다.

     

    또한 아이를 낳고 기름으로써 ‘인구’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여자는 초원에서 너무나 귀한 존재다. 남자들의 입장에서는, 남편을 잃었다고 내버려둘 없는 것이다.

     

    뭉릭은 예수게이의 친동생이 아니라 절친한 부하였지만, 초원에서는 동생이 형과 사별한 형수와 결혼하기도 하고 심지어 아버지가 죽으면 계모와 결혼하기도 한다. 결혼당사자들끼리 피만 섞이면 된다. 이런 문화는 몽골지역 아니라 유목문명에서 흔히 발견된다. 예를 들어 티벳에서는 두 형제가 한 여자와 결혼해 세 사람이 집에서 사는 경우도 있다. 형편이 가난하면 아내를 데려올 처갓집에 바쳐야 할 물품과 노동력을 형제가 ‘공동구매’로 치른다고 보면 된다.

     

    반면 사고방식이 지역중심이 아닌 혈통중심의 유목민들은 <핏줄의 관계>에는 무척 민감하다. 일본은 사촌과의 결혼이 가능하며, 우리도 고려시대까지 근친혼이 용인되는 관습이 있었지만 이런 일은 초원에서는 금기다. 부부사이만 놓고 봤을 ‘족외혼’, 다른 부족-최소한 다른 씨족- 결혼해야 한다.

     

    예수게이는 죽기 전에 테무진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뭉릭에게 어서 테무진을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뭉릭은 데이 세첸의 게르에 전속력으로 달려가 위급한 상황을 알렸다. 사돈이 죽어간다는데 무슨 말이 있겠는가? 데이 세첸은 테무진에게 어서 가보라고 했다.

     

    하지만 혼사가 성사된 마당에 데릴사위가 증발하면 여러모로 상황이 묘해진다. 자칫하다간 딸내미 인생이 꼬일 수도 있고… 그래서 데이 세첸은 이런 말도 빼놓지 않았다.

     

    “아버지 보고 나면 빨리 와!”

     

    그러나 테무진은 이날 이후 오랫동안 보르테와 재회하지 못하게 된다. 데이 세첸과 보르테, 새됐다…

     

    예수게이는 테무진을 별로 사랑한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정실인 헐룬의 장남이다. 테무진보다 나이가 많은 벡테르의 결혼은 챙겨주지 않은 보면, 테무진을 후계자로 생각한 분명해 보인다. 예수게이는 테무진에게 마지막 유언을 전하기 위해 온힘을 다해 버티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들이 도착하기 전에 숨을 거두고 만다.  

     

    5

     

    전편에 설명한 것처럼, 보르지긴족과 타이치우드족의 조상은 ’바보’ 보돈차르의 자식이다. 씨족은 가까운 친척 사이였다. 그래서 함께 이동하거나 같은 곳에서 야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타이치우드의 대장인 ‘뚱뚱이 칸’ 타르쿠타이는, 말하자면 전통적인 기득권층에 속했다. 그에 비해 예수게이는 그가 결성한 사냥꾼+전사 조직의 두목쯤 됐다.

     

    두 사람의 관계는 미묘했다. 각자 자기야말로 분열된 몽골족을 다시 통일할만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둘다 어느 정도 힘이 있는데다가, 초원의 가난뱅이인 주제였지만 굳이 따지고 보면 ‘왕족’이었기 때문이었다. 왕족이라 부르기도 참 뭐한 사이즈이지만…

     

    몽골족 최초의 칸인 카불 칸은 예수게이의 직계 조상이었다. 반면 타르구타이는 그 다음 칸인 암바가이 칸의 후손이다. 암바가이 칸은 생전에 타타르족과 연합을 맺고 싶었다. 그래서 딸을 타타르에 시집보내러 몸소 딸을 데리고 타타르족에게 간다. 그런데 금나라의 사주를 받은 타타르족은 손님인 암바가이를 붙들어 금나라에 팔아버렸다!

     

    카불 칸 때문에 자존심에 먹칠을 기억이 있는 금나라 조정은 암바가이 칸을 처형한다. 그런데 처형의 방식이 무척 비열하고 잔인했다. 말타는 유목민답게 죽어야 한다며, 나무로 만든 당나귀에 태워놓고 못을 박아 죽였다(지덜도 유목민 출신이면서, 이제 중국인 됐다 이거지…).

     

    이후 몽골족은 암바가이 칸의 복수를 위해 타타르와 무려 13번이나 대대적인 전투를 벌였다(늘상 벌어지는 약탈이 아니다.). 그러나 <몽골비사>에 따르면 “원한을 풀지도, 복수를 하지도 못했다.” 에둘러 표현했지만, 대체로 패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는 동안 몽골족은 산산조각났고, 초원의 북방 끝으로 밀려나 연명하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몽골족은 한 조상(보돈차르 부부와 그 후손)을 모시는 사이다. 자연히 함께 제사를 지내게 된다. 최소한 타이치우드족과 보르지긴족은 그랬다.

     

    예수게이가 죽은 후 찾아온 첫 번째 봄이었다. 타이치우드족은 제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제사란 엄숙한 행사라기보다는, 일종의 잔치다. 음식을 나누어먹으며 유대감을 느끼고, 친족임을 확인하는.

     

    그러나 타이치우드족과 예수게이의 부하들은 테무진 가족이 점점 부담스러워지고 있었다. 헐룬과 그녀의 자식 다섯 - 테무진, 카사르, 카쥰, 테무게, 테물린. 소치겔과 그녀의 아들인 벡테르와 벨구테이… 꽁으로 먹여 살려야 입이 9개나 있는 것이다. 여기서 겨우 이정도 ‘복지’도 힘들어했던 몽골족의 가난함을 있다.

     

    헐룬은 아직 젋고(20대였다.) 예뻤지만, 그 많은 애들까지 먹여살릴 여유가 있는 남자는 없었다. 뭉릭은 보스의 유언을 지켜줄 수 없었고, 예수게이의 다른 형제들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죽은 남자의 처자식을 ‘인수인계’하려면 당연히 소치겔 모자(母子)들도 책임져야 했다.결국 헐룬은 재혼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한편 타이치우드를 이끌던 뚱보 타르구타이에게, 예수게이의 유족은 정치적으로도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아이들은 금방 자란다. 카불 칸의 직계자손이 장성하면, 자신이 몽골족 전체의 칸이 되는데 방해가 될 가능성이 있다. 지금처럼 보르지긴씨족과, 씨족에 모여든 전사들을 보호해주면 나중에 테무진과 그의 형제들에게 충성할 있다. 그때가 되서 테무진이 자기한테 대들면…?

     

    타르구타이는 씨족의 장로 격인 두 노파, ‘우르베이’와 ‘소카타이’와 공모하여 테무진 가족을 버리기로 결정한다. 죽여버리면 속편하겠지만, 아무 이유 없이 친족에게 그런 짓을 했다간 바닥에 떨어진 평판을 다시는 끌어올리지 못할 것이다. 참, 두 노파는 금나라에 끌려가 비참하게 죽은 암바가이 칸의 미망인들이었다. 칸은 죽었지만 미망인은 자신들이 소속된 타이치우드족뿐 아니라 몽골족 사람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6

     

    타이치우드족은 제사가 열리는 시간을 테무진의 가족에게만 알리지 않았다. 그러고서는 이른 아침에 제사를 뚝딱 해치워버렸다. 제사에 참석하지 못한다는 , 친족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제삿밥을 나눠주지 않는 의미는 분명했다. 앞으로도 나눠줄 없으니 알아서 살아가라는 . 여자 둘에 애는 일곱이나 있는 가족에게는 죽으라는 얘기였다.

     

    잠에서 깨 소식을 들은 헐룬은 분통을 터뜨리며 애들을 데리고 제사지내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우르베이와 소카타이를 보고 소리쳤다.

     

    “남편이 죽고, 애들이 어리다고 이럴 수 있는 겁니까? 우리가 왔는데도 당신들끼리만 먹고 있군요. 깨워주지 않은 이유가 이거였군요?” 

     

    두 할멈도 지지 않았다.

     

    “이게 어디서 건방지게… 네가 뭐라고 우리가 ‘어이쿠 와서 제삿밥 좀 드시지요~’ 하고 모셔와서 대접한단 말이냐? 어쩌다 지나가다가 마주치면 얻어먹는 법이다(나그네를 대접하는 초원의 룰을 말함. 즉 헐룬 가족은 이상 친족이 아니라 나그네라는 .).

     

     

    네년이 미친게냐?

     

    그리고는 드라마에 나오는 노인네들이 흔히 쓰는 땡깡을 부린다.

     

    “아이고오오~ 울 남편 암바가이 칸이 죽었다고 내가 젊은것한테 이런 취급을 다 당하는구나아아~” 

     

    두 노인네는 헐룬이 무슨 큰 죄라도 지은 양,

     

    “새로운 목영지를 찾아 이동하자! 헐룬네는 남겨둔다. 아무도 저것들을 데려가지 마라.”

     

    하고 선언한다. 헐룬이 느낀 분노와 암담함은 정말 끔찍했을 것이다. 온 가족이 굶어죽으라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전직 칸의 두 미망인의 명령대로, 예수게이의 부하들도 타이치우드족을 따라나섰다. 어차피 (사냥과 약탈 등으로) 먹고살기 위해 여기저기서 모여든 사람들이다. 예수게이라는 강력한 구심점이 사라지자 이상 미망인과 고아들 옆을 지켜줄 이유가 없었다. 타르쿠타이 입장에서는 전력이 늘었으니 호재였다.

     

    다음날 아침, 의지할 데 없는 가족을 버리고 떠나는 사람들 앞을 웬 노인이 막아섰다. 그는 예수게이의 부하 뭉릭의 아버지인 ‘차라카’였다. 차라카는 이래선 안 된다고, 예수게이와의 신의를 지켜야 한다고 사람들을 말렸다. 원래 입바른 소리 하는 사람, 자기의 죄책감을 자극시키는 사람이 가장 미운 법이다. 웬 남자 하나가 말에 오른 채로 차라카의 등을 창으로 찔러버렸다.

     

    “당신이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테무진이 중상을 입고 게르에 누워있는 차라카를 찾아갔다. 차라카

     

    “네 아버지가 모은 나라(몽골어 ‘울루스’ 여기서는 ‘사람들의 모임’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사람들을 몽땅 데려가길래 말리다가 그만… 이렇게 되고 말았다.

     

    그 말에 테무진은 견디지 못하고 울면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얼마나 분하고 슬펐을지 상상이 되고도 남는다. 차라카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었다.

     

    이 절망의 순간, 헐룬이 죽은 남편 예수게이의 영기(靈旗)를 꺼내들고 떠나는 사람들 앞에 갑자기 나타났다. 두둥~




    전사가 들고있는 것이 영기. 말총으로 만든다.

     

    영기는 영어로는 보통 ‘war banner’, 즉 ‘군기’로 번역된다. 물론 군기로 쓰기도 한다. 하지만 몽골에서 영기는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영기는 사령관이나 등의 지도자들이 쓰는 물건으로, 사람의 지위와 위치를 나타낸다. ‘군대’나 ‘가문’보다는 어떤 ‘한 사람’을 상징하는 경향이 있는데, 여기엔 일종의 무속신앙이 녹아들어있다. 영기는 사람의 영혼과 인격을 대변한다. 영기의 소유자가 죽으면, 사람의 혼을 머금는다.

     

    예수게이의 영기는 예수게이의 영혼이나 마찬가지였다. 예수게이를 따르던 사람들은 그의 ‘영혼’을 마주하자 죄책감과 두려움에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러나 ‘먹고사니즘’보다 무서운게 어디 있으랴? 사람들은 기어이 떠났다. 헐룬이 사람을 데려오는데 성공하기는 했다. 그러나 사람들도 한밤중에 도망가버리고 말았다. 그것도 헐룬네의 가축까지 싹 훔쳐서…

     

    영기 에피소드를 보면, 헐룬이 굉장히 영리하고 대담한 인물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비록 당장은 실패했지만, 헐룬이 남편의 부하들에게 남긴 ‘양심의 가책’은 훗날 테무진에게 엄청난 자산이 된다. 

     

    하지만 그건 나중 얘기고, 지금은 괜한 했다가 여자 둘에 애덜 일곱이 초원의 방랑자가 되는 것도 모자라 가축까지 없어졌다. 가축은 초원 사람들에게 삶의 기본 전제다. 버림받은 가족은 이제 거칠고 척박하고 위험하기까지 초원 북방에서 굶어죽는 일만 남았다.

     

     

    7

     

    헐룬은 아이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먹을 수 있는 건 가리지 않고 긁어모았다. 사냥에 나설 남자들이 없었기 때문에 잡을 있는 거라곤 들쥐나 생선 따위가 전부였다. 그것도 언제나 있는 아니었다. 그래서 태무진 가족은 들풀과 야생 열매를 먹었다. 헐룬은 “오논 강을 위아래로 뛰어다니며 앵두와 머루를 따서 허기를 달랬다.” 역사는 테무진 가족의 화려한 웰빙식단을 기록하고 있다. 부추, 신나리, 달래…

     

     

    숨어있는 먹을것을 찾아보아요~ (오논 강의 사진)

     

    가축의 젖까지 육식으로 치면, 몽골족들은 아무리 가난해도 100% 가까이 육식을 했다. 식물성 음식을 먹어온 울나라에서도 풀을 뜯어먹는 기근과 궁핍의 전형적인 이미지다. 초원 사람들의 입장에서, 풀은 사람이 아니라 가축이 먹는 거다. 사람은 고기를 먹는 동물이다.

     

    가난하디 가난한 초원의 북방이었지만, 헐룬과 그녀의 자식들은 그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바닥까지 떨어졌다. 이때의 테무진 가족은 역사에 기록된 가장 배고픈 가족이다. 글타… 역사상 최고의 정복자는 성장기때 영양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한 결식아동이었던 거시다. 갑자기 서울유치원 다니는 5세 훈이 생각난다. 

     

    헐룬은 10년 전만 해도 부유하고 평화로운 올쿠누트족에서 사랑받고 자란 예쁜 소녀였고, 곁에는 사랑하는 연인도 있었다. 몽골족보다 훨씬 잘나가는 메르키트족으로 시집가서 행복하게 사는 일만 남았었다. 그런데 이렇게 불행해지다니.  

     

    하지만 근성의 헐룬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무도 예수게이의 유족들이 살아남으리라고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헐룬의 노력 덕에 테무진 가족은 잡초처럼 살아남았다.

     

    어느덧 테무진은 사춘기가 되었다.

     

     

    (다음편 ‘살인의 추억’에서 계속)

     

    원본 위치 <http://www.ddanzi.com/blog/archives/32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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